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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의승, 최소 1만명 넘는다”

  • 교계
  • 입력 2024.03.04 09:00
  • 수정 2024.03.06 13:25
  • 호수 1719
  • 댓글 4

[살아있는 구국의 역사 임진왜란 의승]
2.속속 드러나는 의승의 활약

선조 환궁, 평양성 탈환, 청주성 수복, 행주대첩서 혁혁한 공적
영규의 800의승부터 휴정의 5000의승, 처영의 1000의승까지

 

한국 역사상 최대의 전란으로 꼽히는 임진왜란에서 순국한 의승은 얼마나 될까. 최소 1만명은 넘을 것으로 관련 연구자들은 추정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후대에까지 이름이 전해진 인물은 휴정, 유정, 영규, 처영 스님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의승 활약은 유생 의병에 밀려 가려지고 잊혀졌으며 조정으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관직이 서훈된 극소수 경우를 제외하곤 기념이나 추모조차 외면 받아왔다. 

다행스럽게도 일부 논문을 통해 이들의 활약을 확인할 수 있다. ‘의승장 기허영규와 의승의 봉기’(황인규, 2017), ‘뇌묵 처영의 생애와 불교사적 위상’(김상영, 2018), ‘뇌묵 처영의 의승 활동과 금산사’(양은용, 2020),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의 승군 및 의승수군과 주둔지 흥국사 고찰’(송은일, 2021), ‘조선의 의승, 기억과 추숭의 담론’(김용태, 2023)이 대표적이다. 

이들 논문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전란 극복에 앞장섰던 군사 조직은 세 부류가 있었다. 관군·의병·의승이다. 여기서 '관군'과 사대부가 중심이 된 '의병'은 의무적이면서 당위성이 짙은 군대였다. 반면 '의승'은 자발적으로 이뤄진 조직이었다.

심지어 스님들은 연산군~중종대라는 최악의 불교탄압기를 거친 뒤라 사회적 신분이 가장 낮은 천민에 불과했다. 하지만 살생, 즉 ‘월계(越戒)’라는 괴리감 속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발적인 참전을 결행했다. 혁혁한 공도 세웠다. 선조의 환궁, 평양성탈환, 청주성 수복, 행주대첩, 노원평 전투 등은 분명 의승의 공적이다. 

문화재청 금산 칠백의총기념관이 상영하는 애니메이션 속 조헌 선생과 영규대사. 
문화재청 금산 칠백의총기념관이 상영하는 애니메이션 속 조헌 선생과 영규대사. 

이들의 참전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제1차 금산성(눈벌)전투이다. 고경명은 영규 스님과 수백명 의승의 모습에 “하늘의 도움”이라고 감탄했다. 임진왜란 최초의 승장 기허영규 스님(?~1592)과 300~500여 명의 의승은 1592년 7월 9~10일 이틀간 금산에 주둔하던 왜군을 쫓아냈다. 고경명이 그해 6월 11일 7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을 때 이미 의승 수가 포함됐다는 분석도 있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고경명·고인후 부자(父子) 시신을 찾아나선 것도 의승들이었다. 

충북 옥천 가산사 전경.
충북 옥천 가산사 전경.

전투가 끝나자 의승들은 충북 옥천 가산사 혹은 문경 혜국사로 향해 훈련을 받았다. 7월 15일 청원 안심사로 가, 7월 말 청주성 서문 앞 빙고현에 주둔했고, 8월 1일 청주성 전투에 참전해 승리했다. 800명의 스님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탔고 적들은 밤을 틈타 도망갔다. 의승의 활약 덕에 조선은 청주성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에 탈환할 수 있었다. 왜란 발발 이후 들려온 첫 낭보였다. 

제2차 금산성(연곤평)전투에선 다수의 의승이 순국했다. 당시 영규 스님은 조헌에게 무모한 전투라고 설명하며 의병군의 전열을 재정비한 뒤 관군의 지원을 받아 금산을 진격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조헌은 이를 듣지 않았다. 의승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해 참전했고 결국 전사했다. 비록 모두 목숨을 잃었지만 이들 활약으로 왜군으로부터 호남을 막아냈고 관군이 반격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해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이외에도 영규 스님과 함께한 스님 법명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호남 지역 승장 희묵 스님, 도현 스님과 성택 스님, 남원 출신으로 전라좌도 총섭을 맡아 금성을 수축하고 금산 전투에 참전한 고봉운일 스님을 비롯해 부여 임천 보광사 소속 스님 등도 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에 대해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성해응(1760~1839)은 ‘금산순절제신전’에서 “영규와 함께 거사한 자로 이름이 전하지 않는 자가 많은데 '진산 미륵사초혼기'에 종사관 신문(信文), 의병장판관 공연(公衍), 종사관 운우(云祐) 의병장 도신(道信) 의병장 홍선(弘渲),  의병장 각해(覺海), 의병장 홍월(弘月), 의병장 인진(印眞), 의병장 지한(智閑), 의병장 운담(云談), 의병장 지원(智元), 군관승 학호(寉湖) 만은 기록되어 있다”고 전한다.

통도사에 모셔진 청허휴정(淸虛休精, 1520〜1604) 스님의 진영.
통도사에 모셔진 청허휴정(淸虛休精, 1520〜1604) 스님의 진영.

의승들이 청주성 전투를 승전으로 이끌었다는 소식에 임금 선조는 묘향산 보현사 청허휴정 스님(1520~1604)을 찾아갔다. 전란 극복의 해결책이 의승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선조는 휴정 스님에게 팔도십육종도총섭이란 직첩을 내리며 의승군 조직을 요청했다. 휴정 스님은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국에 격문을 돌리며 참전을 독려했다. 각 사찰에 통문이 도착하기도 전, 5000여 명의 스님들이 모였다. 특히 의엄 스님은 군량미를 모으며 황해도에서 의승 500여 명을 모았고 또 다른 제자인 관동의 유정 스님과 호남의 처영 스님도 각각 승군을 일으켜 수천 명의 승군을 모았다. 의승군 기본 조직구조는 의엄 스님이 통솔하는 1000여 명, 유정 스님 산하의 700여 명, 처영 스님 산하의 1000여 명으로 구성됐다.

1593년 1월 9일 평양성 탈환 과정에서도 의승의 공은 지대했다. 평양과 중화를 오고 가는 적을 공격해 보급로를 차단했다. 파죽지세의 왜군 앞에 전의를 상실했던 관군과 의병들도 의승군의 활약에 사기가 크게 진작됐다. 몇 달 뒤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에도 유정 스님은 산을 잘 타는 승병들과 함께 큰 공을 세웠다. 평양성을 탈환하자 유정 스님은 다시 권율과 함께 영남에 내려가 큰 전공을 세웠으며, 장기전에 대비해 병량과 병기 준비에 온힘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을 승전으로 이끄는 데도 기여했다. 1593년 2월 12일 처영 스님과 참전한 의승 수는 1000~1500명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경사가 완만한 지역인 산성의 서북면을 담당했다. 경사가 완만한 곳은 곧 적의 공격이 가장 용이한 지점이다. 1000~1500명 스님이 접전 초기부터 이곳의 방어를 담당했다면 전투 병력 가운데 정예군으로 분류됐거나, 그야말로 무참한 희생을 전제로 한 배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법정 스님은 황해도 한명윤 등과 합세해 전공을 세웠고, 홍정·성정 스님은 각각 1000여 명의 승군을 이끌고 충청도에서 참전했다. 자윤윤눌 스님은 흥국사에서 300여 명의 의승을 규합해 웅천 전투에 참전했고, 1594년 기암법견 스님은 전남 장성 입암산성의 축조를 감독했다. 홍신 스님 등 153명 의승군은 석주관 전투에 참전해 모두 순국했다. 

전라좌수영 의승수군은 이순신 지휘 하에 요해처 파수 임무와 해전에 참가했다. 이들 활약은 관군보다 월등히 뛰어나 두치·석주·팔양재 등 호남방어의 요해지에 배치됐고 돌격대에 편성됐다. 규모도 최소 600여 명을 상회했을 것으로 보인다. 1594년 3월 10일 이순신이 의능 스님과 수인 스님의 해전 공로에 대해 포상해 줄 것을 주청하는 장계에서 이들이 각각 300여 명의 의승을 거느리고 해전에 임했음을 밝히고 있다. 시호별도장 삼혜(三慧), 유격별도장 의능(義能), 우돌격장 성휘(性輝), 좌돌격장 신해(信海), 양병용격장 지원(智元) 스님 등이 대표적이다.  

의승수군이 등장한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의승수군이 등장한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의 한 장면.

김상영 전 중앙승가대 교수는 “단위를 절대화할 수 없겠지만 평양성 탈환, 금산전투, 행주산성전투만 보아도 최소 1만명의 스님들이 순국했다”면서 “간신히 법명이라도 하나 찾는 게 전부지만 이 파편들을 모으는 것이 거룩한 희생 앞에서 후손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고 말했다. 김용태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도 “휴정 스님이 ‘나이 들고 병든 이를 제외하곤 모두 종군하라고 했기에 임란 첫해에 5000명의 스님이 조직됐고 이들이 의승으로 활동했기에 1만명은 거뜬히 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황인규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스러져간 의승을 발굴하는 작업은 결코 종교적인 사안이 아니다. 역사적인 문제”라고 강조했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720호 / 2024년 3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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