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만에 어느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급한 일인가 싶어서 바로 전화했더니 반가운 목소리로 안부를 먼저 주고받게 됩니다. “스님! 스님의 근황은 유튜브를 통해서 잘 알고 있어요. 예전에 비하면 살도 찌셨네요!” 순간 반가운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상대방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것이 반갑다는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근황들을 묻고 전화를 끊었는데 남은 마음은 ‘유튜브에 나갈 땐 살을 빼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고 ‘나도 이제 늙어 가는구나!’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됩니다. 가끔 어르신 보살
대만의 여름은 고온다습해서 한낮의 바깥활동은 그야말로 고난이다. 아스팔트가 푹신푹신한 8월 여름 한 낮, 나는 학교를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서있었다. 연거푸 혼잣말로 “얼굴이 익어가는 구나~”하며 홀로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주 허름한 옷차림에 몸이 한 쪽으로 기운 할아버지 한 분이 버스정류장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바로 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어르신은 느닷없이 내 손을 잡더니 손바닥에 무언가를 쥐어주고는 아무 말 없이 오던 길을 되걸어가셨고, 엉겁결에 손을 잡힌 나는 놀라 얼른 손을 펴보았다. 내 손안에는 동전 10원이 놓여
명상 중 가장 효과적인 명상은 소리 파동 명상일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그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명호를 구구절절 외치는 명상은 일찍이 경전에서도 대단한 효과를 설해왔습니다.‘관세음보살보문품’에 이르기를 “선남자야, 만일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여러 괴로움을 받을 때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명호를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듣고 모두 해탈케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물과 불의 재앙에서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고난에서 벗어나는 등 가지가지 위험 속에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불러 그 일이 해결된다고 하셨습니다
“우울감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잘 안돼요.” “쉽게 짜증을 내는 편인데 그러고 나면 내 자신이 너무 싫어져요.” “스스로를 채찍질하는데 지쳤어요. 그렇다고 멈추기는 두려워요.”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 때문에 사소한 일들도 계속 곱씹게 돼요. 그래서 너무 힘든데 다른 방법을 모르겠어요.” 사실 마음을 다루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애쓰고 자책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나에서 다른 내가 되길 원하지만 잘되지 않습니다. 변화하고 싶은 마음과 건강하지 않은 삶의 방식과 태도가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면서 나를 괴롭히고 이것은 자기 비난으로 이어집니다
며칠 전 어느 거사님이 종무소에 명함을 두고 갔다고 합니다. 들어보니 20대 초반 강원도 인제군 원통면 천도리에서 군대 생활을 함께하던 한 달 후배였습니다. 근 30년 넘어서의 연락에 바로 전화하진 못하고 며칠이 지난 뒤 통화하며 그동안의 안부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니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 시절에 배운 경험도 기억납니다. 요즘 인플레이션이 온다고 다들 걱정입니다. 곧 물건이 부족하고 생필품의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분위기입니다. 지금 상황에 옛 군대 시절을 대입하니 ‘경제는 심리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저와 후배
우리는 보통 경제적으로 풍요롭거나 주변사람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호의를 받는 사람을 두고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고 말한다.살기가 빠듯하지만 곁을 돌아볼 줄 알고 버거워하는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보면, 어떤 사람은 “배울 것이 많은 분이다”하고, 어떤 사람은 “아이고~, 본인처지나 살피지~”라며 염려 섞인 말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의 가치관은 각양각색이고 살아가는 모습도 천차만별이다.지인 병문안을 다녀온 후 나는 내가 여전히 걸어 다니는 것에 감사하고 내 삶의 질서를 여전히 유지할 수 있음에 다행이라는
시대나 상황에 따라 변화하여 대처하는 것이 연기적 삶이고 부처님 제자다운 삶입니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낡은 철학이나 관념, 제도 등에 얽매인다면 불행한 사람이 생길 뿐만 아니라 더 좋게 성장하지도 못하고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기회를 잃기도 합니다.전통적인 것은 다 낡고 불필요하며 거추장스러운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것 중에 그런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것은 다 좋은 것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새로운 것 중에는 전통적인 것보다 더 해악을 끼치는 것도 있습니다.전통적인 것을 보수라 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진보라
새벽 목탁소리가 참 좋습니다. 상단예불을 마치고 중단에 ‘반야심경’ 독송을 하는데 불현듯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하는 대목에서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요 며칠 일렁이던 마음이 쉬어집니다. 이것이 부처님 제자로 사는 혜택이구나 싶습니다.불청객 같은 그 마음 안에는 상처받은 나와 상처를 준 상대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내 선한 의도를 알아주지 않는 섭섭함과 슬픔이 있었고,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은 분노도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더 이상 관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음에도 한번 씩 찾아드는 그 마음은
자다가 눈이 뜨입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어제 피곤해서 일찍 잠이 들었나 봅니다. 불을 켜기 전 휴대폰을 찾는 저를 봅니다. 뭔가 아니다 싶어서 손이 가는 것을 멈춥니다. 불을 켜보니 휴대폰이 작고 예쁘게 보입니다. 어제 껍데기를 벗겨 두었더니 자유롭고 가볍게 잘 잤나 봅니다.한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원래 아주 얇고 가벼운 모습이었는데 카드를 넣으려고 덮개를 씌우고 깨지지 않게 하려고 보호막을 입혔더니 두 배 이상 커지고 무거워졌습니다. 가볍고 얇은 본래 모습에 나의 필요와 욕심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
부처님오신날에는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실행하던 분도, 평소 종교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던 분도 사찰을 찾아 희망 담은 연등을 켠다. 도량에 주렁주렁 달린 아롱다롱 울긋불긋 연등에는 어떤 고운 마음들이 담겨 있을까? 나는 지금도 몹시 궁금하다.두껍게 늘어진 어둠이 빛을 받아들이듯, 등불은 어둑어둑한 세상을 밝힌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지혜를 등불에 비유한다. 완성품이 나오기 전에는, 솜씨 가진 분들이 대나무와 철사를 이리저리 구부려 탑, 종, 북, 팔각 모양 틀을 만들면, 우리는 등 틀에 한지나 노루지를 붙이고, 그 위에 오색 습자지
착한 사람이 부자가 아닌 것은 받아들이겠는데 악한 사람이 부자로 사는 것을 보면 너무 불쾌합니다. 과연 인과는 있을까요? 인과가 있다면 악한 이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 세상일은 서로 맞지 않아 보입니다. 기대가 잘못된 걸까요? 세상이 불합리한 것일까요?인과의 법칙은 연기법의 의거합니다. 연기법의 기본 정의는 ‘잡아함경’에 나옵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나며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此無故彼無 此滅
순간이었다. 꺾인 발의 모양이 낯설어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 책상에 앉아서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고 보니 발이 예사롭지 않았다. 온갖 상식을 동원해 얼음찜질을 하고 심장보다 높이 두며 정성을 다했지만 걸을 수가 없었다. 발등 뼈가 부러진 것이다. 단 몇 걸음의 거리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고, 계단이 큰 산처럼 느껴졌다. 작은 움직임에도 퉁퉁 붓는 탓에 포기해야 하는 일들이 늘었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순간 불안이 올라왔다. 존재조차 몰랐던 인터넷 골절카페를 드나들며 위로받았다.
오랜 도반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서 안부 전화를 해봅니다. “괜찮아요. 혼자 푹 쉬는 시간인데요. 많이 아프진 않아요.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지요.” 돌아오는 대답은 스님답습니다. 늘 스님들은 혼자가 될 준비가 되어있고 혼자가 되는 것이 처음 출가할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어쩌면 바쁘게 살던 사람이 나이 들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스님들의 고향은 혼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 인간이라면 모두 홀로 이 세상에 왔다가 갈 때도 홀로 가게 됩니다. 그때 따라오는 감정이 외로움이고 쓸쓸함입니다. 또, 아쉬
바람결은 아직 차가운데 겨우내 흙속에서 숨을 죽이던 풀들은 기지개를 쭉 켜며 봄 맞으러 나온다. 덩달아 내 일손도 바빠져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제멋대로 여기저기 불숙불숙 땅을 비집고 나와 너풀너풀 자라는 풀을 없애야 해서다. 시골 아닌 시골로 들어온 덕에 맑은 공기는 덤이지만, 들여야 할 품은 배다.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나는 방해받지 않고 홀로 조용히 지내고 싶어 산 아래 자그마한 마을로 들어왔다. 마당을 세면으로 포장하자는 권유도, 마당에 돌이라도 두껍게 깔아야 풀이 덜 나온다는 조언도 연신 뒤로하고 잔디를 심었다. 그런데
봉사자도 많고, 공부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을 때는 황룡사가 시끄러웠습니다. 불자님들이 서로 갈등하고, 절 운영에 대한 불만도 있고, 단체끼리 알력도 생겼으며, 처음 오는 불자들은 기존 불자들의 텃세에 불만도 상당했습니다. 기도나 봉사하러 왔다가 상처받고 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종종 들렸고 이 사람이 오면 저 사람이 가고, 저 사람이 오면 이 사람이 가는 등 포교당 특성상 여러 일이 복합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조용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갑자기 이상적인, 화합이 잘되는 사찰이 된 것일까요? 그렇다면
과학의 진보에 따른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일상에 놀라운 유익을 주었지만 반면에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기들 또한 만들어냈다. 지금 세계는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협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어떻게 해야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첨단무기들에 인류가 더이상 희생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절망과 분노가 아닌 상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외부의 평화는 내면의 평화 없이 불가능하다.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이기심과 증오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아침에 선배스님에게 전화를 겁니다. 반가운 목소리입니다. 가벼운 안부를 여쭙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혹시 스님 절에 오늘 가서 하루 자도 될까요?” “언제든지 됩니다! 템플스테이 방이 있으니 오세요.” “고맙습니다. 오후에 가서 뵐게요” 그리고 이곳에 왔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방을 안내받아서 왔는데 문을 여는 순간 휑한 빈방이 약간 낯설긴 하지만 텅 빈 마음 같기도 합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절 마당이 훤히 보입니다. 이불을 깔고 누워봅니다. 세상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인지 오히려 반갑기까
겨우내 얼어붙었던 앞뜰의 흙이 제법 따뜻해진 햇살에 한결 수월한 숨을 내쉰다. 제주의 청매홍매는 꽃을 피우고 한창 향기를 실어 내보내느라 바쁘다. 봄이 들어서는 3월 우리는 시끌벅적한 대선을 치렀고, 이제는 대립으로 쌓은 벽을 허물고 각자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본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호기롭게 말했으니 뒤끝이 온전한 덕망 있는 지도자로 내려오길 바라면서, 젊은 스님들 간 벌어진 논쟁을 조실스님이 위트 있게 해결하는 ‘고구마 천수경, 옥수수 천수경’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점심공양을 마친 스님 몇몇이 모
지난 2월 말 조계종 교육원에서 주관하는 ‘승가결사체 전법교화활동 인증서 수여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승가결사체란 스님들의 공적 모임을 말합니다. 스님들이 의기투합해 펼치는 활동을 종단 차원에서 인증하는 것은 물론 격려지원금도 전달됩니다. 저는 ‘천진불어린이합창단연합회’ 대표를 맡아 지난해에 이어 2022년에도 인증서를 받았습니다. 수여식에서는 각 단체의 사례발표도 있었습니다. 발표는 무척 흥미진진하였습니다. 한국불교는 대사회 공적 활동보다는 개인의 수행을 더 중시하는 풍조가 강한 것이 사실입니다. 대부분 출가자가 참선 수행에 몰두하
SNS에서 명품을 자랑하던 금수저 인플루언서가 사실은 인생도 소장품도 모두 가짜였다는 뉴스가 연일 포털 상위에 노출됐다. 그 배후에 기획사까지 있다 한다. 그녀의 인생을 거짓으로 꾸며 한탕하려던 것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은데 마음 한쪽이 씁쓸해져 온다. 벌거숭이 임금님과 그 백성들이 안데르센 동화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약이 심할 수 있지만 요즘 우리 사는 모습을 보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너도 나도 ‘남들보다 빠르게, 더 많이’가 삶의 기준이 된 듯 싶다. 속도와 효율성만을 강조하며 자신의 보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