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팔만자에눈물 흐르니불교가 다시 보여 일촌밖에 안되지만쓰기에 따라천리 되는 것이 마음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는 훗날 다산 정약용이 ‘문장이 동국의 으뜸’이라고 칭송했을 정도로 한국 한문학사에서 시인으로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또 문학적인 성취는 물론 문학 장르의 폭넓은 활용으로 중세기를 밝혀준 이상적인 교양인인 동시에 한국지성사에서도 맞수를 찾기 어려운 위대한 문화인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어릴 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고 글재주가 탁월했던 그는 22세 때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했으나 관직을 받지 못하고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며 살았다. 빈궁에 시달리다가 32세 때 최충헌의 초청시회에서 그를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 비로소 전주목이라는 벼슬길에 올랐으나 부임 1년 4개월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믿는 것으로, 그 사람의 식견과 양심을 믿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에 꼭 맞는 말이다.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으로 고대 우리 민족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일연 스님은 지금으로부터 꼭 800년 전인 1206년 경산에서 태어났다. 이 해는 칭기즈칸이 몽고족를 통일하던 해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다가 9세에 광주 무량사에서 출가의 길을 걷는다. 어릴 때부터 대단히 총명했던 그는 14세에 강원도 진전사로 가 그곳에서 구족계를 받고, 22세에는 최고 고시인 선불장(選佛場)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후 스님은 현풍 비슬산으로 옮겨 수행할 무렵 몽고의 침략이 시작됐다.
선의 높다란 경지무지한 중생에겐큰 위안 못돼 부처님 염송하는그 마음 또한부처되어 가는 길 역사에도 굴곡이 있다. 조선 세종 때를 태평성세라 한다면 몽고와 왜군의 침략 시기는 살육과 굶주림과 눈물로 점철된 고난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 고난은 사람들을 절망과 상실로 몰고 간다. 하지만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암울함 속에서 영웅과 성자를 배출하기도 한다. 원묘(圓妙)국사 요세(了世, 1163~1245) 스님도 바로 그런 성자다. 정치가 타락하고 종교마저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내란과 외세의 침략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격동의 시대. 스님은 어둠의 한 가운데서 온 몸으로 희망을 말하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1163년 지금의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스님은 12세에 지금의 합천 천락사로 출가했
원효대사가 한국불교의 새벽이라면 지눌(知訥, 1152~1210) 스님은 먹구름을 뚫고 대지를 환히 밝히는 한줄기 빛이었다. 불일보조(佛日普照)이라는 그의 시호처럼 암울한 시대에 좌표마저 상실한 민중들에게 ‘부처님의 해처럼 널리 비추는 나라의 스승’으로 삶의 참된 이치와 영원한 수행자상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1158년 황해도 서흥군 동주에서 태어난 지눌 스님은 국자감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아들을 위해 부모는 온갖 좋다는 약과 명의를 찾아다녔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어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사찰을 찾아 기도를 드렸고, 그러던 중 아이의 병만 낳는다면 출가자의 길을 걷도록 하겠다는 서원을 했다. 그러자 씻은 듯 병이 나았고 어린나이에 그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굴산 종휘 선사 문하로
착취-굶주림 없고당당한 자주국가만들고 싶었다 묘청(妙淸, ?~1135) 스님은 역적으로 몰려 입적했기에 그의 출신과 성장배경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서경(평양)이 고향으로 법명이 정심(淨心)이라는 것과 풍수도참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인물로만 알려져 있다. 스님이 정계에 진출한 것은 같은 서경 출신인 정지상의 소개 때문이다. 정지상은 과거에 합격해 중앙에서 벼슬을 살던 인물로 당대 최고의 시인이기도 했다. 임금의 깊은 신임을 받던 정지상이 묘청 스님을 ‘성인’이라고 일컬었고, 임금 또한 스님을 만난 뒤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채고 스님께 정사의 조언을 구하고 그의 뜻을 따랐다. 묘청 스님은 문벌귀족의 수탈이 극에 이르고 더욱이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마저 불타버린 상황에서 나라의 부흥을 위해
부와 명예와 권력. 이는 얻기도 쉽지 않지만 가진 것을 과감히 버리기란 더더욱 어렵다.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011) 스님의 위대한 점도 여기에 있다. 왕자라는 선망의 자리를 뒤로 하고 어린 나이에 출가한 그는 47세로 입적하는 그날까지 오직 구법(求法)과 전등(傳燈)의 원력으로 수행과 학문의 한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의천 스님은 고려 11대 임금 문종의 넷째 아들이었다. 부왕 문종은 어느 날 여러 왕자들을 불러 놓고 “누가 능히 출가해 복전의 이익을 짓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곧바로 일어나 출가의 뜻을 밝혔고 왕은 기꺼이 출가를 허락했다. 그 때가 1065년, 그의 나이 불과 11세였다. 당시 왕사였던 난원대사에게서 머리를 깎은 스님은 타고난 총명함과 끈기로 무서울 정도로 학문에 천착
보현행원가-주석서이두로 표현한 것민중교화 위한 노력 훗날 의천 스님 비판은내가 실천 외면했다는오해에서 비롯된 것 균여(均如, 923~973) 스님의 속성은 변 씨로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다. 혁련정 거사가 1074년에 쓴 『균여전』에 따르면 어느날 밤하늘에서 황금빛 봉황이 품에 드는 꿈을 꾼 후 어머니 점명이 나이 60세에 임신을 했고 7개월 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균여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이의 얼굴이 지독히도 못생겨 키울 생각을 않고 길거리에 버렸는데 두 마리의 새가 날아와 두 날개로 아기의 몸을 감싸 보호했다. 그것을 전해들은 늙은 부모가 부끄럽게 생각하고 아이를 집으로 다시 데려다 길렀다. 균여는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아버지가 입으로 들려주는 화엄경의 게송을 줄줄 외웠으며 하나를 가르
훈요십조서 전라도를‘반역의 땅’이라 한 건내 이름 도용한 왜곡 15년 만행하며 산천연구풍수는 사람과 땅의상생조화 추구하는 것 한국 지리학과 풍수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도선(道詵, 827~898) 스님은 속성이 김 씨로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태종의 서손(庶孫)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고, 다만 그의 어머니가 꿈에 어떤 사람이 맑은 구슬 한 개를 주어 그걸 삼킨 뒤 임신이 됐다고 한다.어릴 때부터 유별났던 그는 15세에 출가해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읽고 익혔는데 그 깊은 이해에 모두가 놀라 감탄해 신동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스님은 화엄의 세계에 만족하며 머무르지는 않았다. ‘문자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그는 때마침 당나라에서 돌아온 동리산의파의 개조 혜철 선사의 문하에 귀의했고, 결국 그곳에서
문화-가치관 다르다고미개인 취급 하는 것은오만과 편견일 뿐 내가 귀국하지 않은 건그리움 넘어서야 하는수행자 직분 충실한 까닭 1908년 3월 프랑스의 동양학자이자 탐험가인 폴 펠리오는 중국 돈황 천불동에 오래된 두루마기 필사본의 여행기 하나를 찾아냈다. 그것은 혜초 스님이 수만리 서역보다 먼 망각의 강을 건너 우리 곁에 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세계 4대 여행서의 하나로까지 평가 받는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704?~780) 스님은 신라가 고향으로 16세 때 원광, 자장, 원측, 의상 스님 등이 그러했듯 서해를 건너 중국 땅에 발을 디뎠다. 그곳에서 인도인 금강지 스님으로부터 밀교의 정수를 익힌 혜초 스님은 스승의 권유에 따라 ‘떠날 때는 100명이나 돌아오는 이는 하나도 없다’는 멀고도 험난한
신들린 듯 가락에 취한 몸짓, 쉴새없이 쏟아내는 리듬의 경합,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는 지켜보던 이들을 압도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북과 꽹과리를 두들겨댄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힘이 느껴지는 연주, 구성진 가락을 뽑아낸 고등학생까지 총 12팀의 ‘끼’가 무대 위로 올려질 때마다 관객들의 입에서는 탄성과 환호, 박수가 이어졌다. 대한불교청소년연합회(총재 현성 스님, 이하 청소년연합)가 5월 28일 동국대 중강당에서 개최한 ‘제 19회 청소년 전통예술경연대회’는 청소년들의 ‘끼’와 재능을 확인한 자리였다. 지난 1988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는 이 대회는 매년 10여개팀이 참가하는 대표적인 청소년 전통예술 한마당. 올해도 전국 각지에서 12개팀이 참가해 삼고무, 꼭두각시 무용, 탈춤체조,
해동에禪 물줄기 끌어당긴‘한국의 달마’ 진리 터득하면활활자재 하리니정진 또 정진하라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겠다’던 중국의 유명한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 선사는 “강서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의 스님에게 속하게 됐구나”라고 했다. 바로 신라의 도의(道義, ?~?) 선사를 두고 찬탄한 말이다. 호랑이와 외뿔소를 사로잡고 용과 뱀을 가려내는 팔팔한 선기(禪氣), 거기에 온 세상을 한 입에 삼키기도 하고 뱉기도 할 듯한 기개와 인품을 도의선사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도의 선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육조 혜능대사의 선법(禪法)으로 일컬어지는 남종선을 전한 신라의 고승이다. 비록 언제 태어나고 입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북한군(北漢郡),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에서 태어났고
쌀 한줌으로 연명하며 정진죽음 각오한 구도 끝에서윤회 벗어날 희망 발견 경덕왕의 보살계 수계는당대엔 흔한 신심의 표현율사로서 어찌 거절하리 진표(眞表, 718?~?) 율사는 해동 미륵신앙의 비조로 일찍이 중국에까지 명성이 자자해 『송고승전』에 그의 전기가 수록될 정도의 뛰어난 고승이었다.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12세에 출가해 만행과 처절한 수행을 통해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의 수기를 받은 이후 수많은 이적과 법회를 통해 평생 민중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교화의 삶을 살았다. 진표 율사는 통일신라 때 태어나고 활동했던 인물이지만 『송고승전』의 기록처럼 오히려 ‘백제인’으로 많이 알려졌다. 그가 멸망해버린 백제지역 출신이기도 했지만 평생 권력과 명예를 멀리하고 늘 굶주리고 소외받는 유민들의 곁에서 그들에게
결혼 대신 출가 하려얼굴 상처낸 동생 보고평생 수행자의 길 걸어풀옷에 단식 두타행맹수에 몸 공양하기도티베트에 선불교 전해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 스님은 지난 20세기 최대의 발굴로 손꼽히는 돈황문서를 통해 1200년의 긴 잠을 깨면서 비로소 우리에게 그 존재가 알려졌다. 초기 중국 선불교의 핵심인물로 부각됐던 그는 놀랍게도 신라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속성이 김 씨였기에 중국에서는 ‘김화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입적 후 ‘무상공존자(無相空尊者)’로 추대되기도 했다. 인도를 제외한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500나한상의 한 분으로 조성해 모시고 있을 정도다.무상선사는 인성염불(引聲念佛)을 통해 무념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법이 널리 알려졌으며, 사천성 일대를 중심으로 중국 선종사의 대표적 계파
누구나 지옥 짊어지고고통-절망하는 게사바세계 중생의 삶개 ‘선청’은 내 도반지옥 비우지 않고서 성불하지 않으리라아미산, 보타산, 오대산과 더불어 중국 4대 불교 성지로 손꼽히는 중국 구화산. 매년 수십만명의 불자들이 찾는 이곳 구화산을 지장보살의 성지로 만든 분이 바로 지장법사 김교각(地藏, 696~794) 스님이다.신라의 왕족으로 태어난 스님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힘이 남달리 세어 장사였으며 지혜와 위엄이 있었다. 유한한 현실적 가치보다 무한한 가치를 추구했던 그는 24세 출가해 법호를 지장이라 했으며 얼마 후 개 ‘선청’을 데리고 당나라로 구법과 교화의 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수행력으로 75년간 머물며 수많은 이들을 교화했다.지장법사가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 받은 것은 그가 99세로 원
나는 스님 아닌 거사자기 욕망의 분출을무애라 변명 말라요즘도 신라와 비슷나를 칭송하기보다중생의 아픔 감싸라한국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자 종교인으로 손꼽히는 원효(元曉, 617~686). 이 나라 불교의 새벽을 활짝 열어젖힌 그는 성과 속을 자유로이 넘나들던 무애도인이자 분열과 다툼을 종식시킨 화쟁의 달인이었다.초지보살로 일컬어지는 원효는 그 탄생부터 신비롭다. 617년 어느 날,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아이를 밴 한 여인이 경산 불지촌(佛地村)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산기를 느낀 그녀는 미처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밤나무 아래에서 아이를 낳았다. 이 때 새들은 노래하고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전한다. 부처님의 탄생 설화를 쏙 빼닮은 이 아이가 바로 원효다.귀족가문에 태어난 원효의
가시덩굴 속에서내가 닦은 백골관은고도의 초기불교 수행계율은 승단과 사회청정케 만드는 시대 뛰어넘는 규범자장(慈藏)법사의 성은 김 씨, 속명은 선종랑. 진한의 진골이었던 소판 무림의 아들이었다. 늦게까지 자식 하나 없던 선종랑의 부모는 천수관음께 지성으로 기도드린 뒤 별 하나가 떨어져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꾼 뒤 아들 자장을 낳았다.진평왕 12년 무렵(590) 부처님 오신날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천성이 맑고 슬기로웠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부모와의 사별은 선종랑을 깊은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왜 태어나면 죽어야 하나?’ ‘죽음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인간의 영원한 화두인 삶과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 선종랑에게 더 이상 세속적인 삶은 의미가 없었다. 가족의 눈물을 뒤로
세속오계는전란속 실천 가능한부득이한 방편점찰 법회로 힘겨운 백성들에게희망 심고 싶었다이차돈 성사의 순교 이후 신라에 대가람 황룡사 창건 불사가 진행되고 국가차원의 불교행사가 잇따르던 진흥왕 28년(567). 열세 살 소년 원광(圓光, 542~630)은 긴 머리를 삭둑 자르고 불문에 귀의했다. 어려서부터 도교와 유교의 경전을 두루 섭렵했던 소년은 목마른 대지가 단비를 들이키듯 불교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갔다. 그러던 원광은 서른 살 때 경주 안강 삼기산에 금곡사를 창건해 그곳에서 6년 동안 생사를 건 용맹정진에 들어갔다.그러나 원광의 구도열정은 그로 하여금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했고, 마침내 험한 산과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향하게 했다. 진평왕 11년(589) 진나라로 건너간 원광에게 중국불교는 거대한 산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지 1700여 년. 그 동안 불교는 한민족의 숨결이 되고 핏줄이 되어 고원한 정신문화의 새 영역을 활짝 열어젖혔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생활, 문화 전반의 근간으로 여전히 펄떡이며 숨쉬고 있다. 역사가 민중이라는 거대한 물줄기에 의해 흘러간다면 그 물줄기의 방향을 트는 것은 선각자다. 오랜 세월 불교가 이 땅의 중생들에게 빛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숱한 불교 선각자들의 피와 눈물과 법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과 공간이라는 장벽을 훌쩍 넘어 불꽃같은 치열함으로 살아갔던 그들을 만나보자. 편집자박고슴도치가 내이름당시 왕실-백성들 중불교신자 많아내 죽음 정치쇼 아니다기적 믿음의 여부는시대의 자화상일 뿐번득이는 칼날이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