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 직강에 나선 선명상 아카데미 일곱 번째 강좌가 8월 20일 열렸다. ‘내 팔자 바꾸는 기가 막힌 방법’을 주제로 열린 이번 강의는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마지막 강의 현장이었다. 8월24~25일 공주 한국문화연수원에서 열리는 선명상 템플스테이를 앞두고 진우 스님은 지금까지 진행한 강좌의 핵심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진우 스님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고락사의 감정이며 이런 감정이 인연 연기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지 않도록 이를 다스려야 하며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 선명상임을 거듭 강조했다. 진우 스님의 일곱 번째 강의를 요약했다. 이날 강의에는 청주에 위치한 공군사관학교 불자회 생도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편집자]
지금까지 계속 강의를 이어오며 반드시 전하고 싶은 것은 공식이었다. 선명상을 하는 데에도 공식과 같은 방법이 있어 그 방법을 알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선명상을 할 수 있다. 그 공식을 알려주고 싶었다.
공식 가운데 첫째는 내 마음의 구조를 아는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다. 내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현상이 왜 이렇게 보일까, 내가 보는 것이 과연 정확할까. 착각일까, 과연 진짜로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육경이 모두 마찬가지다.

현상은 육근과 육경의 마찰이다. 만약 눈과 보이는 대상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보이는 데로 보고 들으면 된다. 문제는 보면서 마음이 작용을 하고 들으면서 좋고 싫음이 생기는 데 있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보이는 모든 대상이 고정돼 있어서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고, 원인과 결과가 일정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게 깨졌다. 양자물리학 때문이다. 토마스 영이라는 유명한 물리학자가 실험을 했는데 이중슬릿 실험이다. 구멍을 두 개 뚫어서 전자 알갱이 하나를 쐈는데 두 구멍을 모두 통과했다. 여기서 양자역학이 나온다.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 되어서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할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도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즉 입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입지가 아니라 파동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이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존재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내 감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안이비설신의로 색성향미촉법을 접하는 데 있어 불필요한 것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대상의 본질은 따로 있는데도 본질을 보지 않고 엉뚱한 일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불편해지고 불필요한 인연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중슬릿 실험에서 보듯 수 천 년 해온 고전물리학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아인슈타인도 죽을 때까지 인정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모두가 인정하는 시대가 됐다. 앞으로 기술이 더 발전하면 인간의 생각을 읽어내고 생각이란 무엇인지도 밝혀낼 것이다.
알갱이인 줄 알았던 것이 파동이었다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것을 관찰카메라로 살펴보니 하나로만 통과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보는 것이 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생각을 보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처럼 이제 서서히 불교, 불법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유튜브 등에는 불교와 현대물리학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화엄경’의 화엄법계라든가 특히 법성게는 완전한 양자역학의 세계다.
감정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 감정과 저 감정이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이다. 좋은 마음 생기면 싫은 마음도 생긴다. 좋은 마음이 들 때와 싫은 마음이 들 때의 사이에 시차만 각각 다르게 있을 뿐이다. 모두들 좋은 때가 언제이고 나쁜 때가 언제이냐를 궁금해하며 이것을 소위 팔자소관이라고 한다. 팔자란 태어난 연월일시에 따라 운명이 결정돼 있다는 것이다. 이 사주팔자를 갖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불교적 논리로 보면 이건 어린애 장난 같은 소리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보면서 좋겠다, 싫겠다, 편하겠다, 힘들겠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는 각자 개인의 느낌이다. 괴로운 상황인 것을 알면서도 그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런 상태에 계속 끄달려가면 더 힘들어진다. 반대로 그 감정에 계속 끄달려가지 않는다면 힘들 것도 없다.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 원인은 이미 전생으로부터 쌓여왔다. 그것이 업식이다. 전생의 업과로 지금 나타나는 모습들을 보면서 내가 반응을 하면 그 작용이 또 다음 과보로 이어진다. 결국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삼세양중인과다. 어떤 일이든 그런 일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있다. 그런데 때로는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경우에도 그 원인이 나에게 미치기도 한다. 그럴 때라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사회에 책임을 묻기도 하고, 국가에 책임을 요구하기도 한다. 아니면 부모, 자식, 선생 등 누구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할까. 복잡해 보이지만 이 강의를 들었다면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상은 다만 작용할 뿐이다. 깨달은 눈으로 보면 그것이 묘용이다. 자업자득이라고 하듯이 내가 지은 만큼 받는 것이다. 인과도 반드시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도 똑같이 좋은 일과 싫은 일이 있는 것이다. 기분 좋은 질량과 기분 나쁜 질량은 같다. 다만 그 인과가 나타나는 시간이 다르다.

그 숙업의 업장을 점점 사라지게 하는 것이 수행이고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 선명상이다. 선명상으로 업장을 줄여가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좋은 만큼 나쁜 일이 생기는 일이 반복된다. 부자가 되고 거지가 되는 것은 인연 현상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좋고 싫어지는 내 마음은 돈과 상관없이 선명상을 하지 않는 한 계속 반복된다. 성인군자라도 지 그름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기분 좋고 나쁨이 있으면 성인군자가 아니다. 다만 그 진폭이 좀 적을 수는 있겠지만 선명상을 하지 않으면 감정의 등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빛의 진폭에 차이가 있듯이 감정도 똑같다. 파장이 짧을 때가 있다. 갑자기 좋았다 나빠지는 경우다. 이 감정의 파동이 업의 크기다. 대단히 기분이 좋은 사람은 대단히 기분이 나빠질 때가 있을 것이다. 기분 좋을 일이 많지 않은 사람은 기분 나쁠 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감정의 파동이 점점 작아져 진폭이 없어지는 것이 마음이 일여한 상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분별을 내지 말라고 하셨다. 감정의 진폭을 줄이는 방법이다. 현상, 대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을 보고 감정을 일으키며, 지어내며 자업을 드러내는 것이 문제다.
내가 갖고 있는 감정덩어리가 내가 가진 업식임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일으키는 좋은 감정, 싫은 감정이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 전생으로부터 이어져 온 내 업의 발현이고 결과이기에 내 몫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계속 대상의 탓을 한다면 내 업식만 더욱 쌓일 뿐이다.

인과의 업이 작용하는 것을 줄여나가는 또 하나의 방법은 좋은 마음을 내는 것이다. 삼독심을 줄이는 것도 그 방법이고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감정의 진폭을 줄여나가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좋고 싫음의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결국 육근이 청정해지는 것이다. 육근이 청정해지만 육경에는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육근으로 느끼는 것에 좋고 싫음을 민감하게 일으키지 않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선명상을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좌선이 좋지만 서서 해도 좋고 걸으면서 해도 좋다. 무엇을 보든 소리를 듣든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내 마음이 일으키는 감정을 나 스스로가 어쩔 수 없기에 수행하는 건데, 그 수행이 어려우면 5분 명상, 우선멈춤 명상, 무시로 명상 등등 무엇이든 방법을 택하면 된다. 결론은 스스로의 마음의 문제는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해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도돌이표가 될 뿐이다. 오늘부터 꼭 실천하시기 바란다. 한국사회의 미래, 인류의 미래는 선명상에 있다.
[진우 스님에게 질문 있습니다]
질문1>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화가 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우 스님> 일단은 그냥 두세요. 성질도 생로병사합니다. 일단 5초 참고, 가장 좋은 것은 ‘이뭐꼬’ 화두를 잡는 겁니다. 화두는 마음을 깨친 조사가 내는 소리입니다. 마치 진언과도 같습니다. 그 화두 하나를 잡아서 몰입하는 것이 간화선입니다. 오롯하게 집중함으로써 좋고 싫음의 분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질문2> 선명상 대중화를 위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진우 스님> 인류가 이 상태의 삶을 계속 살아가면 업덩어리만 남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 마음도 원자와 똑같아서 몸이 없어진 후에도 업식덩어리만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죽어서도 괴로운 감정을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류의 구제를 위해 반드시 선명상이 필요합니다. 이 선명상이 더욱 대중성을 갖도록 강연을 하는 이유입니다.


[1742호 / 2024년 8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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