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가 노란 꽃을 피웠다. 뜰에 자라는 한 그루일 뿐이지만 제일 먼저 봄소식을 알리고, 늦서리에도 빨간 열매를 달고 있어서 우리 절에서 사랑받는 나무이다. 도심 포교당에 살다보면 어금니 빠지듯 통째로 계절을 망각하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어디에 무슨 꽃이 있다면 나가 보고 싶기도 하다. 지금 같으면 섬진강변의 벚꽃도 그렇고, 지리산 산동마을 산수유 군락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반추되는 기억들 중에 유난히 선명한 것은 시집가듯-절 밥이 눈치 밥이라는 말처럼- 온전히 새 삶에 익숙해져야 했던 행자시절에 본 조계산의 모든 것이다. 『논어』에 보면 재아가 공자님께 “삼년상(喪)은 너무 길고, 일 년이면 족하지 않느냐”고 묻는 부분이 나온다. ‘사계절이 한 바퀴 돌고나면 모든 변화를 다 본 것이니 충분하지
도반스님들이 꽃샘추위와 함께 찾아와서 작은 사슴의 섬 소록도에 다녀왔다. 이제 차별과 소외의 뱃길이 사라지고 평등과 소통의 다리가 열렸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 감동 깊게 읽었던 구도소설 『솔바람 물결소리』가 떠올라 다리를 건너가는 것이 더욱 애절하게 다가온다. 한 소년이 한센병 환자를 부모로 두었는데 구도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음성환자인 마을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보살행의 실천을 그린 소설이었다. 어느덧 하얀 목련이 벌써 지고 있는데 많은 관광객들은 한센인들이 그 동안 겪었던 깊은 한을 위로하는 듯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원생들은 자녀가 태어난 경우 전염을 우려해서 격리하고 한 달에 단 한 번만 면회가 허용 되었다고 한다. 그 면회 장소를 ‘수탄장’이라 한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으니 섬 속에
부처님께서 한 번은 마가다국의 들판을 지나시게 되었다. 당시 이 나라는 16개의 부족 국가 중에서도 4개의 강대국 중 하나였다. 작물이 자라고 있는 논들은 둑을 경계로 질서정연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광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것을 보시고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저 잘 정비 된 마가다의 들판이 보이느냐?”“예, 부처님.”“아난다, 너는 저 들판과 같이 비구들의 가사를 만들어 보아라.”“예, 부처님.” 부처님을 위시한 대중이 원래 머물던 라자가하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난다는 몇 벌의 가사를 만들어 부처님께 보여드렸다. 이것을 보신 부처님은 비구들을 모이라 하여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아난다는 참으로 총명하구나. 내가 간단히 말하였는데도 천 조각들을 잇대어 잘 만들었구나. 잘라진 조각들을 기워 입
바람이 연 이틀 숲을 뿌리 채 흔들어대더니 나뭇가지에는 어느덧 새 움이 트고 있다. 오늘은 순한 바람이라서 그 간 미루었던 텃밭을 갈아엎고 씨앗을 뿌렸다. 겨우내 켜켜이 쌓여 익은 무명의 거름을 끌어내고 땀 흘려 설계하여 예쁘게 가꾸어 놓았더니 볼수록 뿌듯하다. 꽃피는 삼월에 찾아와 수행자들의 살림살이를 점검하게 하는 부처님의 출가재일과 열반재일은 잠시 꽃 소식에 들뜬 기운을 가라앉히는 커다란 경책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사대문을 통해서 무상을 느낀 후 위대한 포기를 통해 부귀영화를 헌 신짝처럼 던져버리고 욕망의 성문을 박차고 출가를 결행했다. 그것은 모든 중생들이 본래 성불이어서 여래와 더불어 조금도 차별이 없음을 증명해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수행을 하지 않으면 부처의 씨앗을 감추고는
부처님 당시 인도사회는 16개의 부족국가들이 난립해 있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서로 싸우지 말고 화합하여 살기를 바랐다. 당연히 국가의 형태로는 어느 특정 개인이나 세력의 독주보다는 공동의 논의를 통하여 국가를 경영해가는 공화정을 선호하셨다. 한번은 마가다국의 왕이 이웃 왓지국을 침범하려는 마음을 먹고 그 나라가 어떤 상태인지를 우회적으로 알아보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서 물었던 것이다. 특사(?)는 총리대신, 브라흐만 왓사까라였다.부처님은 시자인 아난다에게 다음의 내용을 묻고 답하는 우회적 방법으로 그의 물음에 답하셨다. 왓지 사람들이 서로 자주 모임을 갖는지, 화목하게 모이고 헤어지고 화목하게 일들을 잘 처리하는지, 전에 제정되지 않은 것은 제정을 삼가고, 전에 이미 제정된 것은 폐하기를 삼가고, 왓지인
봄비가 흠뻑 내리고 나니 산과 들은 온통 생기로 가득하다. 생강나무는 산에서 제 일 가는 봄의 전령사답게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무더기로 피어오르고 있다. 오랜만에 고향마을 제석사에 다녀왔다. 황톳길은 비가 오면 소들의 발자국으로 얼룩지고 웅덩이처럼 고인 흙탕물을 밟아서 하얀 바짓가랑이에 붉은 물이 들면 야단을 맞았던 추억의 길을 밟고 왔다. 뒷산 중턱에서 샘처럼 솟아오르며 시작되는 물은 수량이 풍부하여 가뭄에도 아랑곳없어 예와 지금이 둘 아님을 변함없이 노래하고 있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도량을 새롭게 결계하고 천일기도 정진으로 여법하게 불사를 하고 있는 모습에 훈훈한 감동을 받았다. 색신이 법당이어서 아프면 부처가 영험이 없으니 건강을 잘 챙기라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도량을 둘러본다. 절 마당에
시인 박노해를 봤다. 신부 쪽의 손님으로, 근자에 우리 절에서 치렀던 결혼식 하나의 축시의 낭송도 겸해서다. 식이 파하고 차를 대접하며 한담을 나눴다. 물론 시인과 나는 초면이었다. 내가 “~씨”를 붙이지 않는 것은 그의 시집 『노동의 새벽』을 읽고 “얼굴 없는 시인”이라는 말이 떠돌던 한 때의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듯 나에게 별다른 호칭 없이 그냥 이름만 부르고 싶은 분으로는 김지하 시인과 곽재구 시인이 더 있다. 출가를 앞둔 나에게 굳이 선물이라며 동아리의 후배 아이가 손에 들려주던 시집이『애린』이었다. 지금까지 출간된 시인의 책을 거의 모두 사서 읽었으니 열혈 독자라 하겠다. 언어와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기가 그리 쉽던가! “화엄개벽”이라는 통째로 한 세상을 열어 보이는 이 분은 신묘(神妙)할
해는 구름 속에 숨었고 도량에는 바다 안개로 가득하다. 아마도 비가 올려는 모양이다. 작년 여름부터 섬에는 비다운 비가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관음상 앞에 나아가 두 손을 모으고 자비의 먹구름을 드리워 법비를 내리시고 모두가 해탈을 이루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법화경』 「약초유품」에서는 “하늘에 구름이 일어 큰 비가 내릴적에 온 산과 들에 가득한 풀과 나무들은 그 크기에 따라서 물을 받아드린 것이 다르다”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차별 없이 한 맛으로 법을 설하지만 사람들은 그 수준과 근기에 따라서 법을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효스님께서도 부처님은 오직 “사람이 본래 부처”라는 일승만을 설했지만 근기에 따라서 차별이 있다고 했다. 세상은 지금 온통 불기운에 휩싸
정초 산림기도를 마쳤다. 음력 정월의 7일간의 신중기도는 절집에서 연년이 치르는 고유한 행사이다. 삶은 우연적이라 미리 한해의 무장무애함을 불전에 기도드리는 것이다. 시작을 중요시하는 마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르지 않는데, 좋은 시작이 일의 절반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일주일 내내 법문을 하고 회향과 더불어 방생까지 마치고 나니 온실엔 벌써 튤립이 피었다. 봄이 멀리 않았다는 소식이다. 지방과 달리 서울에서는 올해는 눈 구경을 거의 못해서인지 가는 겨울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절집에서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이뤄지는 공부나 기도 모임을 ‘산림(山林)’이라 한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 ‘총림(叢林)’이 있다. 총림은 염불원·선원·강원·율원 등을 갖춰야 한다. 종합수도원 쯤 되겠다.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
새해 벽두부터 찾아온 동장군이 맹렬한 기세를 떨치며 오르내리고 있다. 예부터 선사들은 춥고 배고플 때 오히려 발심이 되어 수행하기 좋은 시절이라고 했다. 여러 지성인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추위를 뚫고 마음의 소를 찾아서 머나먼 섬에 찾아왔다. 오후 햇살이 넉넉하고 따스해서 바다로 내려간다. 은빛 파도는 정갈한 몽돌 밭에 내리어 묘음으로 구르고 듣는 성품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세상의 소리는 저마다 차별이 있고 자기주장이 남아있어 서로 화합하기 어렵지만 모든 강물이 바다에 이르면 차별이 사라지고 일미평등을 이룬다. 이것이 파도소리이며 소리 없는 소리여서 바로 무심에 계합한다. 마치 어머니의 자장가 소리가 아무런 뜻이 없지만 어린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잠에 들듯이 파도소리는 세상의 고통에 시달린 사람들에
세밑에 자리 잡은 동장군(冬將軍)의 기세가 해를 넘기고도 거침이 없다. 땅이 얼고 만물은 움츠러들겠지만 초목은 이런 겨울을 나야 뿌리가 들뜨지 않고 자연에 적응하는 힘이 길러진다. 그렇다고 겨울이 무슨 뜻을 가진 것은 아니다. 주기(週期)가 바로 질서인데, 천체에서 미물에 이르기까지 존재에 필요한 힘을 상호 간에 얻기는 해도 서로 간섭의 의지는 없다. 무심이랄까? 인연이 모이면 생겨나고 그 인연이 다하면 소멸될 뿐이다. 반대로 인간은 정(情)이란 게 있어서 모든 상황마다 자극을 받고 순응을 하던 역행을 하던 나름대로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삶의 원칙성(經)과 융통성(權)이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 “천장지구(天長地久,도덕경 7장)”라는 제목의 홍콩영화가 있기도 했지만, 인간의 유한함과 달리 천지
새벽 예불 시간까지 불던 강풍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오늘은 본사에 포살이 있어 가는 날이다. 새해 들어 첫 장날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대합실에 모여 서로 덕담을 나누고 있다.아침 해는 은빛 파도를 붉게 물들이며 서서히 뱃머리에 오르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바다에 나갔던 배들이 하나 둘 항구로 돌아오고 있다. 오랜만에 나그네가 되는 듯 쾌활한 기분에 차창으로 들어오는 산과 들이 함께 길을 나서는 듯 반갑게 인사를 한다. 걸망을 메고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서 들어간다. 처음 출가했을 때가 생각나고 아직도 옛 발자국의 흔적이 남아있는 듯하여 자박자박 걸음을 옮기며 초발심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본다. 어느덧 고색창연한 일주문에 이르러 소멧돌에 조각된 선정과 지혜를 상징하는 두 마리 사자 석상을 만져보니
당대(唐代)의 여순양이란 사람은 도가에서 출발했다가 선종에 귀의하여 황룡선사의 문하에 들기도 했었다. 하루는 여순양이 남경에 이르러, 남루한 늙은이로 변해 한 떡집을 찾았다. 주인은 노파. 그는 매번 떡을 얻어먹으면서도 돈을 내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속되던 어느 날 여순양이 물었다. “벌써 몇 년째 얻어만 먹는데 왜 돈을 달라하지 않소?” 노파가 별 표정 없이 말했다. “당신은 돈이 없어 보이잖아, 그래서 안 받았지.” 여순양이 고마워하며 자신은 신통이 있으니 원하면 신선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때 노파는 “난 찰떡이나 파는 게 편하다오”하고 거절했다. “그럼 큰돈을 벌고 싶지 않은가? 손가락만 대도 무쇠가 황금으로 변하는 비법이라오.” 그러면서 손가락을 쇠그릇에 댔더니 정말 황금으로 변했다.
실핏줄 같이 투명한 숲에는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마침내 기축년 새해가 진흙밭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오고 있다. 오랜 무명이 일시에 걷히고 나니 첫 배는 마치 무소처럼 거친 파도를 갈아엎어 하얀 포말을 지혜로 소용돌이치며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비야리성의 유마거사는 부처님 제자들의 병문안을 받고 “중생이 병들었기에 나도 병들었으며 중생의 병이 나아야 나의 병도 따라서 나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마치 부모가 품안에서 기른 사랑하는 자식이 병이 들면 그 자식을 따라서 함께 병이 들었다가 자식이 나으면 부모의 아픔도 함께 사라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이 병든 것은 무시이래로 지은바 탐진치의 삼독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을 둘로 보고 소유가 전부인양 끝없이 탐욕을 부추기며 존재의 가치를 망각한 채 욕망
의기에는 의기를 더하고(有意氣時添意氣)풍류가 아닌 곳에 또한 풍류로다.(不風流處也風流) 한 해의 끝자락이다. 닳아진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는 시간의 연속에서, 그래도 뒤돌아보는 심경은 복잡하다. 무덥던 여름, ‘쇠고기 협상’에 대한 저항의 촛불이 사람 사람의 손에 들렸었지. 이 질료는 ‘자기 성찰의 빛’이라는 미학에 어울리게 가물가물하면서도 얼마나 강한 전염성을 내포하는지 잘 보여주었다. 이어진 정권과 불교계의 불편, 그리고 세계경제의 동반 추락이라는 태풍이 휘몰아쳤다. 아직도 우리는 그 불황의 깊이를 모른다. 잘 살아보자는 공통의 꿈이 이렇게도 요원하단 말인가. 안타까운 것은 위기일수록 온 국민이 대동화합하여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하는데, 내놓는 정책마다 상위 기득권층을 위한 것이요, 언론에 재갈을
섬에도 첫 눈이 내리고 있다. 마치 철없는 나비떼들이 허공 가득 군무를 펼치고 있는 듯 펄펄 날아오르고 있다. 어느덧 나뭇가지에는 살포시 내려앉아 눈꽃을 피우고 몽돌밭에는 목화솜을 깔아 놓은 듯 은빛 파도와 만나서 동색을 이루어 세상은 온통 바다가 되었다. 섬들은 가부좌를 틀고 선정에 들어 일체 생멸인연이 사라진 법성의 바다에 하얀 연꽃으로 피어오른다. 마침 오늘은 구들방이 완공되어 처음 군불을 때는 날이라서 축제라도 벌어진 것 같다. 저녁연기는 매서운 바람을 가르고 힘차게 굴뚝으로 솟구쳐 올라 하늘 끝에 닿았고 아궁이에는 일체 번뇌의 티끌을 태우고 있다. 그러나 티끌은 몸을 바꾸지 않고 바로 광명으로 화하여서 이글거리는 불덩어리들이 오색 사리인양 지혜를 나투고 있다. 냉랭했던 돌 속에 어느덧 피가 흐르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에 전해 내려온다는 다음의 이야기는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음을 먼저 기억하고 읽으시라. 차분하고 과묵한 성격의 한 농부가 한가롭게 풀밭에서 소 두 마리에게 풀을 뜯기고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또 하나의 다른 농부가 근처에 앉아 쉬다가 물었다. “저 소들은 먹이를 잘 먹습니까?” “어떤 것 말이오?”그 농부가 약간 당황해하다 뜸을 들인 후에 말했다.“저 흰 소요!” “흰 소는 잘 먹습니다.”“그럼 검은 소는요?” “검은 소도 잘 먹습니다.”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을 앉아서 풍광을 바라보았다. 그 지나가던 농부가 입을 열었다.“저 소들은 젖이 잘 나옵니까?” “어떤 것 말입니까?”“흰 소 말입니다.” “흰 소는 젖이 잘 나옵니다.”“그럼 검은 소는요?” “검은 소도 잘 나
숲에는 스산한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빈 가지들 사이 고욤나무에는 붉은 감 하나마다 부처님, 온통 진실을 드러내며 거룩한 만다라를 펼치고 있다. 항구에는 정박해 놓은 크고 작은 배들이 물결을 따라서 오르고 내리면서 부딪혀 내는 소리가 마치 오케스트라를 듣는 듯 황홀하기만 하다. 뜰 앞에는 국화가 지고 있는데 한 줄기 차가운 서풍은 웬일로 처마 끝 풍경을 자꾸만 흔들어대고 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스쳐가는 모든 인연들은 성품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지나간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 가지 일에 허물이 없다”고 했는지 모른다. 온 종일 하는 일은 범부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때론 바쁘고 힘들 때도 있지만 본분사를 드러내는 일이어서 한 치의 오차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직 남아있
세계불교도우의회(WFB)가 진각종의 지역본부 가입을 승인했다. WFB는 11월 14~17일 일본 도쿄에서 제24차 세계총회를 열고, 진각종의 지역본부 가입을 공식 승인했다. 특히 올해는 진각종 창종주인 회당 대종사가 1958년 방콕에서 열린 제5차 세계총회에 처음으로 참석한지 50주년이 되는 해로 그 의미를 더했다. WFB는 이 자리를 통해 조계종 중앙신도회와 열반종 등의 17개 지역본부 가입도 함께 결정했다. 이번 총회에는 진각종 통리원장 회정 정사를 비롯해 16개국 62개 지역본부에서 400여 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한편, WFB 팬 와나메티 본부회장은 이번 총회에서 진각종에 미얀마 사이클론 피해 구호성금 지원에 대한 감사장을 전달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