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 자신의 수행이자 타인과 소통고리 지계 통해 인격완성-완전한 소통 이뤄야 1년 동안 독자와 함께해 온 계율교실의 마지막 원고를 쓰는 오늘이 공교롭게도 제17대 대통령선거일이다. 선거일은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알리는 날이기도 하지만, 5년 동안 국정을 운영해 온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마무리를 시작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2002년 오늘 선거에서 승리한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적이고 부패한 국가 시스템을 혁신하여 서민과 소외받았던 사람들이 밝게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고 국민에게 많은 기대감을 주었다. 하지만 지난 5년을 되돌아보면 노무현 정부는 국민들과 진심으로 대화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실책을 지적하는 여론에 귀를 막고 대통령과 정부를 의도적으로 음해하려는 세력의
행복, 욕망 벗어난 청정한 삶서 비롯 두타행으로 정신적인 만족감 키워야 지난 호에 소개한 두타행의 내용을 읽고 그 혹독함에 놀라 아예 우리 재가자들과는 상관없는 수행이라고 선을 그어버린 분들이 있지는 않았을까 염려스럽다. 버려진 헝겊으로 만든 옷가지를 걸치고, 걸식으로 식사를 해결하며, 지붕 없는 야외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수행해야 한다니,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분명 현대인에게는 무리한 요구이다. 현대인뿐만이 아니다. 부처님 당시의 출가자들에게도 두타행은 어려운 실천행이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출가자들에게 두타행의 실천을 의무화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는 수행자들을 매우 칭찬하셨으며, 출가자라면 청빈한 삶을 통해 물질의 상속자가 아닌 법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두
탐심 버리고 번뇌 제거하는 수행욕망 절제 통해 청정심 회복해야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살아온 덕에 이사에는 꽤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하건만, 아직도 이삿짐을 꾸리고 펼칠 때마다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건들에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동안 끌어 모은 물건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책이야 직업상 그렇다 치더라도, 등치 큰 가구를 비롯하여 수납할 공간조차 찾기 어려운 넘쳐나는 옷가지와 신발들, 장식물들…. 게다가 냉장고 속은 더 가관이다. 유통기한을 이미 훌쩍 넘긴 음식물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지구상에는 굶어죽는 사람도 많다는데 하며 한 순간 울적한 마음에 죄스러움까지 느낀다. 이사 때마다 절제와는 거리가 먼 자신의 생활 방식에 몸서리치며 반성해 보지만, 어찌 된 일인지 여기 저
올바른 재가 삶 제시한 대승계의 정수교만심 버리고 자비 통해 이타행 강조 대승계경 가운데『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이라는 경전이 있다. 전 7권 28품으로 구성된 이 경은 서기 426년 북량에서 오백여 명의 재가보살들의 요청으로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했다고 한다. 경명에 등장하는 우바새란 남성재가신자를 말한다. 즉 남성재가신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계를 모아 놓은 경전인데, 설사 경전의 이름에서는 배제되었다 하더라도 여성재가신자도 대상으로 하는 재가불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계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은 발보리심이나 자비심, 발원, 육바라밀, 해탈 등 매우 다양하지만, 이들이 모두 올바른 재가생활을 위한 가르침으로 귀일한다는 점에서 대승계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 경은 독자적인 대승경전은 아니며
대승불교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이다. 오로지 자신의 수행의 완성이라는 시점에서 계율의 실천을 설했던 일부 성문승들과는 달리, 대승교도들은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자비의 마음으로 계율을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타인을 위한 활동 역시 자신의 수행 완성에 큰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삼취정계(三聚淨戒)는 이와 같은 대승의 정신을 잘 담고 있는 대표적인 대승계이다. 삼취정계란, 섭율의계(攝律儀戒)와 섭선법계(攝善法戒), 그리고 섭중생계(攝衆生戒)를 가리킨다.『유가사지론』등에 의하면, 섭율의계는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을 지켜 악을 막는 것이다.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아보고 허물이 없는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7중(衆)의 별해탈율의(別解脫
십여 년 전부터 참여불교 혹은 사회참가불교(Engaged Buddhism)라는 것이 크게 주목받아 왔다. 이 말은 불교도들의 사회적 활동을 총칭하는데,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사회를 만들어가는 불교’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불교도들이 적극적인 자세로 이상적인 사회 만들기에 앞장서고자 하는 이 흐름을 바라보며 불교가 다시 한 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호흡을 함께 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해 본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불교는 출가교단의 경우든 재가불자의 경우든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 적극적으로 사회적 실천을 실행해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를 만들어가는 불교의 가능성을 강조하며 불교도의 사회적 실천을 외치는 의식 있는 사람들의 존재는
계를 주제로 한 몇몇 경전 가운데, 특히『범망경(梵網經)』은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국가에 큰 영향을 준 경으로 꼽힌다. 이 경은 화엄경에 근거한 보살계위와 대승계에 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승계를 설한 후반 부분은 특히 대승교도들의 실천항목을 담은 것으로서 우리나라의 불교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이 경은 인도 제작으로 구마라집(鳩摩羅什)이라는 스님에 의한 번역이라고 여겨져 왔지만, 근년의 연구에 의하면 5세기경에 중국에서 성립한 위경(僞經)인 듯하다. 그런데『범망경』이라는 동일한 이름의 경이 초기경전 가운데도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는『범망경』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대승『범망경』을 떠올리지만, 빨리어로 된 초기경전, 즉 니까야(nikAya) 속에『범망경』이라는
지난주에 교토(京都)에서 열린 계율 연구회에 다녀왔다. 귀국하기 전에 교토의 계율 전공자들과 친분을 맺고 또 최근의 연구 동향에 관해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연구회가 끝난 뒤 함께 식사를 하는데, 한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계율을 전공하기 시작했을 무렵, 그러니까 1980년대만 해도 계율 연구는 찬밥 신세라 전공자가 다섯 손가락도 못 채울 정도였는데, 최근에는 계율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정말 꿈만 같은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부터 세계의 불교학계에서 계율 연구는 매우 중요한 연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경(經)이나 논(論)을 중심으로 한 교리 연구에 비한다면 아직 소수이기는 하지만, 그 발전 속도는 심상치 않아 앞으로 몇 년 후에는 이 분야의 연구 성과들과
어제도 인신사고로 지체되는 전철을 기다리며 약속시간에 늦을까 마음을 졸여야 했다. 필자가 주로 타고 다니는 소부(總武)선은 특히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하루걸러 한 번씩은 자살자로 인한 운행 트러블이 발생하는 것 같다. 너무 자주 겪다보니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지만, 굳이 사람 북적거리는 전철역을 자살 장소로 선택한 그들에게서 현대인의 아이러니한 심리 속에 잠재하는 고(苦)를 느끼며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진다.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어찌 자살뿐이겠는가. 전쟁, 환경파괴, 인종차별, 낙태, 사형제도 등‘생명’과 관련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현대사회의 이슈는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그 만큼 현대사회에서 생명의 가치가 경시되고
벌써 몇 달째 각종 언론 매체를 장식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사건이 있다. 세상 살다보면 입이 쩍 벌어질만한 사건 몇 가지쯤이야 듣고 보기 마련이지만,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의 치부를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골고루 담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 그 자체이다. 게다가 불교계의 인사들이 사건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놀란 가슴에 다시 한 번 폭탄을 던졌다. 한창 이 사건이 화제가 되었을 무렵, 필자의 지인 가운데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오계만 잘 지켰어도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정당한 노력 없이 쉽게 돈과 명예를 얻고자 한 것은 도둑질이고,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맺은 것은 음욕을 저지른 것이며, 자신들이 저질러 놓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불교 발생 당시, 인도의 종교계나 일반사회가 초목도 윤회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에 반해, 불교경전에서는 초목의 영혼을 인정하는 교리는 발견하기 어렵다. 불교의 초목에 대한 입장은, 초목에 관한 대표적인 율 조문인‘괴생종계(壞生種戒)’를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초목에 상처를 입히는 것을 금지하는 율인데, 빨리율에서는 이 율이 제정되기에 이른 인연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부처님께서 아라비라는 곳에 머무르고 계실 때 어떤 비구가 나무를 잘랐다. 그런데 그곳에는 수신(樹神)이 살고 있어 화가 나서 그 비구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수신은 마음을 진정하고 부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하여 다른 나무를 살 곳으로 얻게 되었다. 일반사람들은 그 비구의 행동은 하나의 감각기관을 지닌 생명에게 해를 끼치는
초목(草木)이 생명, 즉 영혼을 지닌 유정(有情)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아직 결착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살인 사건 현장에 있던 식물이 훗날 범인의 얼굴을 보자 초음파가 유난히 빠르고 불규칙하게 움직였다거나, 식물을 키울 때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애정을 듬뿍 주면 성장속도가 빨라진다거나 하는 등, 식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점이 종종 거론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초목의 영혼성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불교도의 입장에서는 특히 계의 실천과 관련하여 초목의 생명 여부가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다. 동물이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점에서 그들을 죽여 고기를 취하는 행동이 문제시될 수밖에 없다면, 그렇다면 식물의 경우는 어떤가 라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식물 역시 생명을 지녔다면 동물의 생명을 빼
얼마 전에 백중(百衆)이 지났다. 음력 7월 15일, 우란분절(盂蘭盆節) 혹은 우란분재(盂蘭盆齋)라고도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죽은 조상들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는 날로 인식되고 있지만, 원래 이 날은 불교도에게 있어 좀 더 특별한 날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의 종교가들은 대부분 유행(遊行)생활을 했는데, 우기만은 한 곳에 정주하며 보냈다. 그 이유는 우기에는 풀들이 새싹을 틔우는 등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시기이므로, 이 때 수행자들이 유행을 계속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풀이나 벌레들을 밟아 죽일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당시의 이런 관습을 받아들여 우안거(雨安居), 즉 우기 3개월 동안 한 곳에 정착하도록 가르치셨다. 이 우안거는 보통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이다. 스님들은 안거 기간 동안
한국 불교교단에서 육식 문제가 곧잘 논쟁거리로 떠오르는 것을 보며, 예나 지금이나 육식은 불교도들에게 있어 큰 화두거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3회에 걸쳐 살펴 본 바와 같이, 육식은 인도불교의 역사에서만도 매우 복잡한 변화 과정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육식이라는 행위가 그 만큼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면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불교도들은 육식을 해야 하는 것일까 말아야 하는 것일까. 가능하다면 육식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가축류가 어떤 환경에서 길러지고 있는지 관심 있게 들여다본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심으로 육식을 피하고 싶어질 것이다. 좁은 새장 안에서 평생 날개 한 번 제
육식에 여러 가지 제한을 가하면서도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던 부파교단과는 달리, 대승불교에서는 육식 금지를 설하는 경전들이 다수 등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열반경』, 『능가경』, 『범망경』등은 단호하게 육식 금지를 주장하는 대표 경전들이다.『열반경』에서는 탁발한 음식에 고기가 섞여 있다면 물로 씻어 고기를 제거하고 먹어야 하며, 너무 많은 고기가 들어 있을 경우에는 받지 말아야 한다고 설한다. 이는 분명 초기불교나 부파불교의 입장과 상반되는 것으로, 육식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엿볼 수 있다. 『능가경』에서도‘성스러운 자는 보통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지 않으니, 하물며 부적당한 고기나 피로 물든 음식을 먹겠느냐’고 하며, 나아가‘각각의 생존에 있어 일체중생이 친족, 권속이라는 생각을 품고 일체중생을
초기불교는 분명 육식을 허용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부파불교에 이르러 점차 육식에 대한 부분적인 제한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대승불교에서는 특히 여래장계의 경전을 중심으로 육식을 완전히 금지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인도불교의 역사에서 나타난 육식에 관한 이와 같은 입장 변화, 그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부파불교에서 나타난 육식 제한의 입장부터 보자. 현존하는 각 부파의 율장(律藏)을 보면, 육식에 대한 태도 변화가 흥미롭게 드러난다. 물론 이 시대는 초기불교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기본적으로 육식을 허용하는 입장이었다. 단, 여러 가지 면에서 조금씩 제한되어 가는 경향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불교승단이 당시 일반사회의 눈이나 평판을 의식한 결과라는 점에서 그 사회적 배경
요즈음 웰빙, 혹은 참살이라는 말의 등장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선호하고 있다. 가정의 식탁에도 신선한 야채가 풍성하게 올려지고, 곳곳에 생긴 채식 뷔페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한때는 단백질의 중요 공급원으로서 섭취가 권장되던 고기나 생선이지만, 지나친 섭취는 건강에 해롭다는, 아니 가능하면 완전히 끊고 철저한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는 것이 건강에 유익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제 육식은 일반사람들에게도 고민스러운 먹거리가 된 것 같다. 하물며 불교도의 경우에는 불살생이나 자비, 불성 등과 같은 불교 교리와 정면으로 맞물려 있어 육식에 대해 더 큰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육식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어떤 것일까? 불교는 육식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종교일까?
때로는 배우는 입장으로, 또 때로는 가르치는 입장으로 오랜 세월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다. 선생과 제자라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경험하며 양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그들의 시선 뒤에 담겨 있을 평가가 슬쩍 마음에 걸릴 때가 있다. 나의 스승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또 내 학생들의 눈에 나는 어떤 선생으로 비추어졌을까 등등, 뭐 일종의 자기반성 같은 것이다. 그런데 돌아볼 때마다 한 구석 찜찜한 것을 보면, 필자는 아마 좋은 학생도 좋은 선생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스스로는 변변치 못한 학생이자 선생이었지만, 운 좋게도 훌륭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많았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좋은 스승의 모범으로 삼고 있는 분이 있다. 바로 필자가 일본 동경대학에서 유학하던 당시
최근 우리 사회의 노사관계가 이랜드사태와 연세 세브란스 병원 노조파업으로 상징되는 비정규직문제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정부는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정규직으로 2년을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법률을 제정 시행하였다. 하지만 기업은 임금부담을 이유로 2년이 되면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통고하여 사실상 해고 하는 편법을 취했고, 이에 대해 근로자들이 파업과 집단행동으로 대항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지금처럼 취업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기업은 정규직 전환보다는 계약 해지를 통고하는 방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면 법률만으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고, 기업주와 근로자의 대립적이고 갈등적인 관계를 해소하고 상생 관계를 정착시킬 보
헤아려 보니, 그 동안‘친구’라는 이름으로 만난 이들이 두 세 자리 숫자로는 모자랄 만큼 많은 것 같다. 친구란 생각하기에 따라 정말 폭넓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나이, 성별, 신분, 국적 등 아무 상관없다. 서로 친근감 내지 호감을 느껴 마음을 트면 그것이 친구인 것이다.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자신의 지인들에게 필자를 소개하며 ‘내 친구 이자랑 선생이야’라고 했다. 10살이 훨씬 넘는 나이 차이는 놔두고라도, 그 훌륭한 학문적 성과에 평소 존경의 마음을 갖고 우러러보는 대상이었기에 순간 몹시 당황스러웠다. 동시에, 자신의 제자를 스스럼없이 남에게 친구라는 말로 소개할 수 있는 그 분의 마음 폭에 적지 않은 감동을 느꼈던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 말은 서로 간에 존재하는 어색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