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 경전에서는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면 목숨을 마칠 때 반드시 아미타불께서 눈앞에 나타난다고 하지만, 정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극락에 직접 가서 아미타불을 친견했다는 영험담도 있습니다만, 경전의 말씀도 믿을 수 없다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경험은 더욱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두 분의 실제 임종 모습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물론 임종자가 실제로 어떤 일을 겪는지는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도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먼저 정토 신자로서 임종하신 분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
“그 명호(名號)를 꼭 잡아서 지니면, 목숨을 마칠 때 아미타불이 여러 성중들과 함께 눈앞에 나타나신다.”‘임명종시에 내영’은 아미타불께서 중생에게 베푸는 가장 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일생 아미타불에 대해서 조금도 모른 채로, 그냥저냥 살아도 눈 감을 때 한 번만이라도 ‘아미타불’을 부른다면 극락으로 오는 길을 헤매지 않도록 기꺼이 데리러 오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한 인간이 들이쉰 마지막 한 숨의 순간에 어김없이 찾아가겠다는 아미타불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토 불교를 평생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
“아미타불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 오롯한 마음으로 흔들림 없이[一心不亂] 그 명호(名號)를 꼭 잡아서 지니면”범본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 억념하기를”이라고 하므로 아미타불과 극락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명호만으로도 왕생할 수 있으며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가장 큰 공덕은 ‘아미타불의 명호을 지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명호가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의아해 할 수 있겠지만, 이름이 한 존재를 대표하는 집약된 언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금방 의문이 해소될 것입니다. ‘신맛’이라는 말을 들으면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으로는 저 불국토에 왕생할 수 없다.”‘아미타경’을 읽으면서 가장 당황스러운 구절일 수 있습니다. 정토 불교는 수행하지 못하고, 공덕을 짓지 못하는 중생들을 위한 수행 방편이라고 지금까지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적은 선근과 복덕’으로는 왕생할 수 없다니, 얼마나 많은 공덕을 지어야 왕생할 수 있다는 말인지 궁금합니다. ‘무량수경’의 왕생자 중에서 선근 공덕을 짓는 무리는 중배(中輩)라 할 수 있습니다. 중배가 짓는 공덕은 ‘재계(齋戒)를 받들어 지니고, 탑과 불상을 일으켜 세우며, 출가자에게 음식을 공양’
“이 말을 들은 중생은 응당 원(願)을 일으켜서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게 된다. 왜냐하면, 훌륭한 사람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기 때문이다.”여기서 ‘이 말’은 극락 중생들이 ‘아비발치’이자 ‘일생보처’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세친의 ‘정토론’에는 극락 보살 대중의 공덕을 네 가지로 서술합니다. 첫째, 보살의 신체가 갖가지 응화신으로 나투어 불사(佛事)를 짓는 것이며 둘째, 그 응화신이 대광명을 놓아 중생을 교화해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하며, 셋째, 그 광명이 부처님과 대중을 남김없이 비추고, 모든 여래께 공양·찬탄하는 것이며, 넷째는
‘무량수경’에는 48대원과 게송 형식인 4가지 원을 합치면 총 52가지의 서원이 있습니다. 이 52가지 서원은 법장보살이 세자재왕불 앞에서 세운 자기 국토에 대한 공약입니다. 또한 법장보살이 성불한 지 10겁이 되었다고 석가모니불께서 말씀하셨으니, 그 공약은 모두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시대와 사회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한 자비가 절절합니다. 그야말로 ‘하화중생’의 표본입니다. 정토 불교의 매력적인 면은 부처의 중생 교화뿐 아니라, 중생이 미래에 하게 될 ‘하화중생’도 언급한 점입니다. 그 내용은 제22원에
“극락국토 중생으로 태어나는 자는 모두 아비발치이다. 그 중에는 일생보처(一生補處)가 많다. 그 수가 매우 많아서 세어서 알 수있는 정도가 아니라서 단지 무량무변 아승지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아비발치’ 또는 ‘아유월치’라는 말은 ‘avinivartanīya’ 또는 ‘avaivartika’ 를 음사한 것으로 ‘정정취(正定聚)’입니다. ‘무량수경’의 제11원과 그 과문(果文)에 의하면 극락에 왕생하면 모두가 ‘정정취’에 머물게 됩니다. 그 원인을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확히 밝힙니다.“저 극락에 태어나면 모두 정정취가 된다
“부처님에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성문(聲聞) 제자들이 있는데, 모두가 아라한(阿羅漢)입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모든 보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무량수경’ 제14원에 따르면, 극락에는 성문 제자가 셀 수 없이 많다고 합니다. 단순히 많다는 데 그치지 않고,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이 모두 연각(緣覺)이 되어 백천 겁 동안 헤아려도 알 수 없다”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연각이라면 천안통(天眼通)을 이루었을 텐데, 그 신통력으로도 그 수를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앞서 언급한 ‘아미타경’의 경구에서도 보살들 또한 그
“저 부처님과 그 국토 중생의 수명은 헤아릴 수 없는 아승지겁이기에 아미타라고 한다. 사리불이여! 아미타불께서는 성불하신 지가 10겁이 되었다.”‘아미타(amita)’는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극락 정토의 주(主)가 되는 아미타불은 광명과 수명 모두 한량이 없고, 반(伴)이 되는 극락 대중은 수명의 측면에서 ‘아미타’입니다. ‘무량수경’ 제13원은 아미타불의 수명, 제15원은 극락 대중의 수명에 대한 서원입니다. 모든 서원은 이루어져서 10겁이 넘는 극락이 존재하고 있습니다.수명에 대한 이야기에 위나라 승려 담란(476~5
“저 부처님의 광명을 비추는 범위는 헤아릴 수 없어 시방의 모든 국토를 비추는 데 장애라고는 없다. 따라서 ‘아미타’라 이름한다.”세친은 아미타불을 주장엄(主莊嚴)이라 하여, 정보(正報))의 주(主)와 반(伴) 중에 주(主)가 된다 했습니다. 법장비구가 5겁(劫)을 사유하여 극락을 이루었기에 아미타불이 주지하지 않으면 극락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미타불은 ‘수명(壽命)’의 측면에서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하고, ‘빛’의 측면에서는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합니다. 인용된 경구에서 범본과 ‘칭찬경’은 극락의 여래 명호가 왜 ‘무량수(無量
“저 불국토에 미풍이 불면 모든 보배 가로수와 보배 그물에서 미묘한 소리가 나는데, 비유하면 백천 가지의 악기가 동시에 울리는 것과 같다.”‘무량수경’도 바람이 불면 묘한 법의 소리가 시방 국토에 울려 퍼진다고 하는데, 이 소리를 백천 가지 악기가 동시에 울리는 것에 비유합니다. ‘관무량수경’의 ‘물을 관’하는 제2관(觀)에 따르면, 8종 청풍(淸風), 즉 여덟 방향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은 “광명에서부터 불어오는 것이며, 이 바람이 악기들을 두드리면 고(苦)·무상(無常)·무아(無我)의 소리를 연설한다”고 합니다. 광명은 아미타
“그 국토에는 오히려 삼악도라는 이름도 없는데, 어찌 축생의 실체가 있겠느냐? 이 모든 새들은 모두 아미타불께서 법음이 어디에나 퍼지고 흐르길 바라셔서 변화로 만드신 것이다.”세친은 ‘원생게’에서 “대승의 선근으로 이루어진 극락세계는 평등하여 나무라거나 싫어한다는 이름조차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무량수경’의 열여섯 번째 서원으로 “극락 중생이 ‘불선(不善)’이라는 이름을 듣기라도 한다면 정각을 이루지 않겠다”고 한 것과 관련 있습니다. 이 말은 극락에는 ‘나쁘다’라는 실체가 없기에, 그를 가리키는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대는 이 새들이 실제로 죄를 지은 과보로 태어난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이 불국토에는 삼악취가 없기 때문이다.”아름다운 새소리를 들으며 수행할 꿈에 젖어 있는데, 느닷없이 새가 축생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킵니다. 한번 태어나는 일생보처(一生補處)만 존재하는 극락에 과보를 받아 새로 태어난다는 사실이 의아합니다. 극락에 축생인 새가 없어야 하는 근거는 아미타불의 전생인 법장비구가 세운 서원에서 알 수 있습니다.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한때의 희망인 서원이 극락의 상황을 설명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습니다
“극락중생들은 이 새소리를 듣고 나서 모두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며, 승가를 생각한다.”극락의 새들은 오근, 오력, 칠각지, 팔성도분의 수행법을 극락의 주민들에게 들려줍니다. 그 소리를 들은 중생들은 삼보(三寶)를 생각합니다. 구마라집 번역과 범본에는 보이지 않지만, 현장 번역인 ‘칭찬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덧붙여집니다. “이 소리를 듣고 각자 염불(念佛)·염법(念法)·염승(念僧)하면, 무량한 공덕이 그 몸에 스며들어 수행된다[勳修].”극락의 새소리가 전하는 수행법이 “삼보를 생각”하는 것에 집약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
“극락에는 갖가지 기묘한 여러 빛깔의 새가 있다. 백학, 공작, 앵무, 사리, 가릉빈가, 공명조(共命鳥)인데, 낮과 밤 여섯 때에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보리분(七菩提分)과 팔성도분(八聖道分)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아침 새소리는 단잠을 깨우는 방해꾼이긴 하지만 주위를 환기시키는 아름다운 소리입니다. 극락에서는 낮과 밤 각 세 번씩 새들이 소리를 들려줍니다. 잡색(雜色)을 ‘여러 빛깔’이라고 해석했습니다만, 불교에서 ‘색(色)’은 모양 자체를 뜻하기도 하기에 여러 형태라 해도 됩니다. 극락의
“타방 십만 억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곧바로 끼니 때에 극락으로 돌아와서 밥을 먹고 산책한다.”이른 아침 극락 중생은 밥 먹기 전, 다른 불국토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우리는 먼 길 가기 전에 배고플까 봐 든든하게 먹고 출발하는데, 극락 중생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양을 올리는 일이 먼저입니다. 모든 부처님이 그랬듯 최고의 공덕을 짓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경전에는 없지만, 다른 불국토로 가기 전 본국의 아미타불께 먼저 공양할 것이라 상상해봅니다. 아미타불의 위신력 속에 살기에 늘 경배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라, 따
“극락 중생들은 이른 아침마다 각자 옷자락에 갖가지 아름다운 꽃을 가득 담아 타방의 십만 억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법장비구가 세운 서원 중 제23원은 극락의 대중이 모든 불국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부처님께 직접 공양 올리는 일은 큰 공덕 중 하나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불퇴전지에 이르지 못한 중생은 부처님께 친승공양(親承供養)하면 정정취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극락의 중생은 왕생하여 이미 정정취가 되었지만, 여전히 날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무량수경’은 이 부분을 좀
“저 불국토에는 항상 하늘의 음악이 울리고, 땅은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온종일 하늘에서 만다라꽃이 비 오듯 떨어진다.”극락에 울려 퍼지는 음악에 대해 ‘무량수경’은 ‘인간 세상에서 즐기는 음악보다 천억만 배 훌륭한 음악이 천상에 존재하는데, 그 소리는 극락의 보배 나무 한 종류가 내는 소리에도 견주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아미타경’은 아름다운 음악이 항상 울려 퍼지니 극락에서는 음악을 듣기 위한 개인 소품이 필요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음악이 그저 기분만 좋게 할 뿐이라면 이 때문에 극락에 왕생할 필요는 없을
‘무량수경’에는 극락에 태생하는 이유를 ‘불료불지(不了佛智)’, 즉 부처님의 지혜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료(了)’에는 ‘믿는다’는 뜻은 없지만, ‘명신불지(明信佛智)’에 대입하면 ‘믿는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원효도 그런 해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태생을 ‘의혹중생’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지혜에 대해 의심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들은 무엇을 믿었던 것일까요? ‘무량수경’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지를 의심하면서도 공덕을 닦아 저 국토에 왕생하고자 한다.
극락에는 모두가 화생합니다. 그런데 ‘무량수경’에는 자씨보살이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떤 원인과 어떤 인연으로 극락에 중생은 태생하기도 하고, 화생하기도 합니까?” 이 말은 극락에 태생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태생은 인간처럼 자궁 속에서 일정 기간 발육하여 태어나는 것을 말하지만, 극락에는 화생하므로 부모의 몸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태생이라고 할까요?‘무량수경’은 극락 가장자리 지역인 변지(邊地)에 있는 아름다운 궁전에서, ‘무량수여래회’와 범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