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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탐욕에 휘둘릴 ‘법계도’ 아니다

기자명 법보
  • 사설
  • 입력 2022.10.14 21:05
  • 수정 2022.10.14 21:07
  • 호수 1653
  • 댓글 0

십자가 달린 나전칠화 ‘해인도’
한눈에 보아도 ‘묵주’ 아닌가?
‘종교상생’ 어벌쩡 변명 안 통해
왜곡 사과하고 즉각 철거해야

서소문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가톨릭 나전칠화.
서소문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가톨릭 나전칠화.
연합뉴스 캡처.
연합뉴스 캡처.

법보종찰 해인사가 의상 스님의 화엄일승법계도를 왜곡한 가톨릭 교단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해인사는 서소문 역사박물관과 그 운영 주체인 서울시 및 중구청,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가톨릭 나전칠화’가 설치된 여주 옹청박물관 등 5곳에 공문을 보내 “해인도를 왜곡한 나전칠화를 즉시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아울러 이 문제를 담당할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해인사 총무국장 진각 스님과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심우 스님을 임명했다. 해인사가 이 사안을 얼마나 중대하고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화엄일승법계도는 광대무변한 화엄사상의 요지를 210자의 게송으로 압축한 도인(圖印)이다. 바다가 고요해져 맑으면 삼라만상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듯 화엄의 도리를 명료하게 드러냈기에 해인도(海印圖)라 한다. 화엄 10찰인 해인사(海印寺)의 상징 중 하나가 해인도인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법의 성품을 분명하게 나타내었기에 ‘법성도(法性圖)’라 이름하고, 법계(法界)의 이치를 잘 보여주었기에 법계도(法界圖)라 칭한다.

미로처럼 그려진 법계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의상 스님은 직접 밝혔다. “마땅히 가운데 법(法)으로부터 시작해 여러 번 굽어져서 불(佛)에 이르러 마친다.” 그 말씀에 따라 정 중앙의 법(法)에서부터 7자씩 단락을 지어 읽어가면 처음 시작한 ‘법(法)’ 바로 아래의 불(佛)에 이른다. ‘하나 중에 여럿 있고 여럿 중에 하나이며(一中一切 多中一), 하나가 곧 여럿이고 여럿이 곧 하나라(一卽一切 多卽一)’는 명구도 여기에 새겨져 있다. ‘화엄경’에 담긴 사상을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게 농축시킨 인물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지 않는다. ‘화엄일승법계도’가 수많은 불서 중에서도 명저 중의 명저로 손꼽히는 이유이다. 

신라 고승들의 구법행을 최치원은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무릇 길이란 멀다고 해서 사람이 못 가는 법이 없고, 사람에게 이국이란 따로 없다. 그렇기에 신라 사람들은 승려이건 유학자이건 반드시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서 몇 겹의 통역을 거쳐 말을 통하면서 공부하러 간다.’ 수행자들의 구도 열정과 고난이 그려진다. ‘떠날 때는 100명이지만 돌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말이 회자 되던 때 의상 스님도 길을 떠났다. 그 길은 육로가 아닌 해로였다. 

큰 폭풍우 몰아치면 단박에 난파될 수 있는 배에 몸을 실은 이유는 분명하다. 탐진치에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안겨주기 위함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의상 스님은 법계도를 통해 그 비결을 온 천하에 전했다. ‘나와 너는 서로 방해하지 않고 공존해야 함께 평안‧평화를 누릴 수 있다.’

서소문 역사박물관 제2상설전시실에 한 벽을 가득 채우는 초대형 나전칠화(960㎝×300㎝)가 걸려있다. ‘일어나 비추어라’는 제목의 이 나전칠화는 ‘한국 가톨릭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조형화했다. 상세한 설명이 없어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담긴 ‘십자가 달린 법계도’는 한눈에 보아도 ‘묵주’다. 아닌가? 아니라면 무엇을 형상화 한 것인지 가톨릭 측은 상세한 설명과 함께 답변해야 한다.

가톨릭 교단에 묻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법계도를 형상화한 묵주를 내보인 이유가 무엇인가? 이 대형 칠화는 모두 3점으로 알려져 있다. 서소문 역사박물관을 비롯해 여주 옹청(청학)박물관과 로마 교황청이 세운 우르바노대학 로비에 전시돼 있다. 불자가 아닌 시민과 우르바노대학의 학생과 그곳을 찾은 외국인은 법계도가 가톨릭이 창안한 상징으로 오인할 수 있다. 가톨릭은 이 점을 노린 것인가? 아니면 ‘불교의 상징은 우리가 언제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삐뚤어진 자존심’을 내세우고 싶었던 것인가?

해인사가 요구했듯이 도용 사실을 진솔하게 인정하고 이른 시일 안에 해당 작품을 철거해야 한다. 또한 불자들에게 해인도를 왜곡한 부분에 대해 정중히 사과해야 한다. “묵주가 아니다” “종교간 상생을 담은 것” 등의 어벌쩡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뭇 생명의 안락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법계도가 가톨릭의 탐욕에 휘둘리는 것을 불교계는 좌시하지 않는다. 

[1653호 / 2022년 10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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