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있는 명상법회는 자신을 관하는 수행 시간이며, 동시에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 놀이 시간입니다. 처음 만나는 이들과 인사 나누고 서로를 소개해 주는 첫 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파트너와 10분 정도의 짧은 미팅을 하고, 그 후 형식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파트너를 소개합니다. 그러던 중, 굳은 얼굴로 앉아있던 한 보살님이 부담스럽다며 참가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파트너는 물론, 모두가 어쩔 줄 모르며 당황했습니다. 사실,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저는 소개하는 파트너보다 말하는 본인을 더 많이 봅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와 말투
새하얀 사라(紗羅)가 수월관음을 감싸 안았다. 보관(寶冠), 치마, 요포에 정교하게 수놓인 연꽃·봉황·서운(瑞雲)이 투명한 사라의 틈 사이로 화려한 빛을 발한다. 여러 개의 선을 다중으로 처리한 눈썹, 봄누에 실을 토하듯 부드럽게 그어진 가는 눈, 홍조 띤 엷은 미소. 그리고 섬려하게 내려진 금선(金線). 매혹적이다. 그리고 숭고하다. 지난 3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관에서 월제(月齊) 혜담(慧潭) 스님의 세로 5미터의 대작 ‘수월관음보살 팔부성중상’을 처음 마주했을 때 벅차게 차오르는 환희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중국의 전통 묘법
사조도신(四祖道信, 580~651) 대사는 부처님의 혜명을 잇고 모든 중생들에게 심지법(心地法)을 전해주시고자 호북성(湖北省) 황매현(黃梅縣) 쌍봉산 자락에 사조사를 조성하고 법을 펼치셨습니다. 바로 이곳이 사조사(四祖寺)의 조사전으로 아주 의미가 큰 도량입니다.우리가 화두를 받을 때 제일 먼저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 내용은 ‘달마대사께서 인도에서 중국 땅에 무엇을 가지고 오셨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달마대사께서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분은 양나라 초대황제였던 무제(武帝)입니다. 그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매일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조용히 108배 올리고, ‘천수경’을 읊는다. 그리고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을 한 자 한 자 마음에 새기듯 사경한다. 내면의 흐름과 마주하는 소중한 순간이다. 한 자 한 자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에 자신을 비추고 참회해본다. ‘자리이타’의 발원이 익어가는 시간들이 쌓여가고 또 그렇게 하루의 문을 연다. 언제 어디서부터일까. 아니면 어떤 인연이었을까. 내 삶에서 부처님과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비가 그치고 구름이 물러가고, 하늘이 다시 맑게 개었네. 그대의 마음이 청결하다면, 그대 세계의 모든 것들이 순수할지니… 그때는 달과 꽃들이 그대를 참된 길로 인도하리라.”일본의 선승, 료칸 스님의 시입니다. 맑게 갠 하늘과 순수한 달 그리고 꽃들이 나를 반겨준다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할까요? 자연은 늘 맑고 다정해서 우리를 순수한 의식으로 이끌고 있는데, 그걸 모른 채 살아간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심연의 상태, 투명하게 맑혀진 마음에서는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기쁨과 감동의 향연입니다. 더 바랄 게 없어요. 어수선한
오늘날 우리 사회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끝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은 인생이 편치 않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은 점점 물질적으로 발달되어가고 옛날보다 외형적으로 의식주가 고급화되고 있습니다. 옛날보다 좋은 집에 살고 고층 아파트가 늘어납니다. 식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 한정식 집에 가면 차려진 반찬 수가 무척 많습니다. 옛날에 비해 음식이 매우 고급화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옷도 옛날보다 잘 입고 삽니다. 이러한 외형적인 모습을 보면 분명
제24대 진흥왕 29년(568)에 대창(大昌, 또는 太昌)으로 연호를 변경하고, 북쪽 국경지역을 순행하면서 북한산·황초령·마운령 등 3곳에 순수비를 세워서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표방하였다. 진흥왕은 순수비에서 정복군주로서의 정통성, 유교적인 왕도사상과 새로운 사회윤리관을 제시하였다. 앞선 시기인 개국(開國) 연간에 이룬 영역확장의 업적을 바탕으로 위대한 정복군주로서의 위상을 유교의 이상적 제왕상으로 포장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대창 연호를 사용한 4년간의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의 기사 가운데 대내적인 사실은 대창 원년 10월
내 어엿한 기도와 수행도반인 아들과 딸은 어린이법회 출신이다. 중고교는 물론 대학생법회까지 마치고 사회에서 제몫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1년 중 서너 차례 정도 딸과 함께 청도 운문사 사리암을 오르곤 한다. 이제 자녀들을 어린이법회에 보내고 있는 동림 자모회 불자들도 세월이 흘러 자신의 자녀들과 지금 이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믿는다. 20년 전 나처럼, 그리고 20년 후 지금 나와 자녀들 모습처럼. 아니다. 어쩌면 지금 자모회 불자들은 10만배 공덕을 쌓으며 20년 전 나보다 훨씬 더 활동적인 여성
불교대학에서 경전반을 시작하며 ‘반야심경’을 강의하게 되었다. 경전반에서 첫 과목으로 심경을 강의한다니 약간 실망의 눈빛을 보인 사람들이 많았다. ‘반야심경’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 그랬다. 사실 경전의 기본적인 구조들을 이해하려 하다 보니 짧은 ‘반야심경’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볍게 시작한 것이다.강의를 준비하면서 심경을 나름대로 열심히 학습하면서 깜짝 놀랐다. ‘반야심경’ 한역 번역본도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해설서는 웬만한 스님들은 모두 한 권씩 쓰신 것 같이 많다. 너무 많은 해설서로 인해 진정한 백미를 찾아내 익히기가 힘
교리가 신앙의 내용이라면, 의례는 상징적 표상의 행위다. 신체를 통해 외향으로 표현하는 행위가 의례라는 얘기다. 세속의 공간도 성스러운 시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의례는 신앙공동체를 유지·성숙시키는 원동력이다. 불교의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의례의 설행체계 확립에 매진하는 연구소가 있다. 조계종의례위원회(2011.4 출범)와 함께 의례의 한글·현대·대중화를 선도하고 있는 불교의례문화연구소(2011.9 출범)다. 연구소 개원 이후 매년 2회씩 ‘의례와 종교문화’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할 만큼 의례 분야의 학술토대를 다져가는데 중추 역
어릴 때부터 절에 다니시는 친정어머니를 보면서 커왔다.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어머니와 절에 가곤 했던 시간들이 유년시절의 따뜻한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결혼을 하면서 신심은 더욱 증장되었다. 대불련 출신의 남편 덕분이었다. 남편뿐만 아니라 시어머니께서도 신심이 지극한 분이셨다. 남편을 만나 함께 신행 생활을 하며 우리의 아들과 딸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절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결혼과 함께 우리는 이미 불자 가족이 되었다. 31세가 되던 때, 불교합창단 활동을 시작하게 된 인연도 무척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백중 날 가까운
얼마 전 공주 한국문화연수원으로 노인복지관 최고관리자 역량강화 연수를 다녀왔다. 많은 복지관의 관장님들이 변화하는 노인복지정책에 관한 열띤 토론을 펼친 알찬 시간들이었다. 서울의 바쁜 일상을 벗어나 모처럼 한국문화연수원과 마곡사에서 고즈넉하고 한가로운 산사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힐링의 시간을 갖고 재충전도 할 수 있었다. 늘 바쁘게 서울 생활을 하다 보니 가끔은 이런 산사가 그리울 때가 있다. 무엇을 위하여 이리 바쁘게 사는 것, 정작 중요한 것, 바쁜 것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숨 가쁘게 달리기만 있는 것은 아닌가 뒤돌아본다. 평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