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정암사 주지 법상 스님의 전법 교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스님께서는 어려움을 겪는 스리랑카 신도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시는 일이 다반사이시고 마치 아버지처럼 친구처럼 돌봐 주신다. 정암사에서는 스리랑카 신도들을 위한 법회도 연간 수차례 열린다. 더 많은 스님의 공적이 있으나 이즈음에서 줄일 뿐이다.“선지식을 잘 만나면 생사윤회에서 벗어난다.” ‘아함경’의 말씀처럼 정법으로 이끌어 주시는 스님의 가르침을 통해 나는 점점 더 스스로 규정지었던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나를 귀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금 돌아보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 불교는 성장할 환경으로 설정돼 있었던 것 같다.“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이렇게 주문을 거시듯 암송하시는 할머니의 진언을 따라서 읊고 암송하면서 즐거워하던 어린 시절, 집에 오시던 탁발 스님들을 극진히 대접하시던 할머니, 돌아가실 때는 친분이 있었던 비구니스님께서 할머니를 “관세음보살처럼 편안하신 모습”이라고 비유해주시던 인상 깊었던 말씀, 서예를 하시던 아버지의 묵향이 가득한 서실에서 보았던 춤추는 듯 구불구불한 암호 같은 대부분이 경전 속 구절 혹은 선(禪) 문구, 서울 사는 언니가 친
봉화사 주지 원상 스님은 어려운 불교를 쉽게 가르치시려 노력하시고 실천하신다. 코로나19로 신도들이 함께 모여 법회를 할 수 없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도 봉화사 밴드 ‘행복가득 염불명상’을 통해 ‘오늘의 자비송 염불 명상’을 올려 주시기를 지속하신다. 매일 새로운 법문을 올려 주시려면 얼마나 힘이 드실까. 항상 봉화사 신도들을 위해 애써주심을 짐작만 할 뿐이다. 우리는 읽고 또 읽으면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불법을 생각하고 스님을 생각하며 불자다운 삶의 실천을 발원한다.1박2일의 봉화사 사분정진 체험 이후 환희심과 존경심이 불같이 일어났
서방정토 봉화사를 향해 아미타 부처님께 108배를 올린다.나는 원래 구경을 다녔던 사람이다. 무엇인가 부족한 사람 같아 선뜻 불교에 다가서지 못했고 불법이 너무 어렵고 무슨 뜻인지 몰라 법문을 따라 읽기에 급급했다. 그런 이에게 가을 들판의 햇살처럼 하동 봉화사 주지 원상 스님이 나타나셨다.친정아버님의 49재 인연으로 스님의 법문을 듣고 또 듣게 되었다. 연이어 어머님의 49재까지 지내다 보니 봉화사와의 인연도 깊어지며 불심도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부모님께서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봉화사는 친정같이 편안하고 부모님같이 존경스
30대 말 정법사에 와서 불교대학에 입문하고 처음 다라니기도에 동참한 날을 떠올려본다. 지금은 대작 불사로 웅장한 법당을 갖추었지만, 그 당시에는 작은 법당 그리고 마당까지 가득 불자님들이 앉아서 다라니기도에 동참했다. 그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환희심이 나 처음에는 계속 동참한다는 생각보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가족 중 누군가 시험을 칠 일이 생기면 꼭 다라니기도에 동참하겠노라고 발원했다. 한 달을 기도로 시작하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했다. 3일의 기도를 잘 끝내고 나면 신심과 환희심으로 충만해졌다. 물론 기도의 환희심은
지난달 다라니 기도를 회향하는 날,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법당에 들어온 소년을 보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초공양을 올리며 늦은 시간까지 할머니와 함께하는 그 소년을 통해 시나브로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이 떠올라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뭉클함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쳤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부처님과 인연 맺은 건 소년과 비슷한 나이 즈음이었다. 어머니의 신심은 어린 나이에도 그 지극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머니께서는 집에서 먹을 쌀을 사실 때면 늘 한 주머니 정도 되는 양의 쌀을 먼저 떠서 이물질을 세심하게 골라내시고 집안 한쪽에
불교를 접하고 신행 생활을 이어 온 기간은 10여 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절에 다니고 기도를 해왔다. 살아오면서 삶이 힘들고 지치는 때마다 불교를 종교로 갖고 있음을 위안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이상은 나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무늬만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불교 신자”라고 말하는 것도 망설여졌다. 그렇게 불교에 좀 더 깊이 다가가고 싶을 때 대광명사는 부처님의 품 안으로 성큼 손을 내밀어주었다. 도량에 가자마자 참선반에 문을 두드린 것도 생각해보면 참 당돌한 도전이었다. 그런 나를 반갑고 따스하게 맞이
요즈음 ‘인연’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지난해 12월의 동짓날, 해운대 달맞이 고갯길을 지나가던 중 대광명사에 발길이 닿게 되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한 보살님이 아주 단아한 모습으로 두 손 모아 웃으며 “어서 오세요, 보살님!”하고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이렇게 친절히 대해 주시는 사찰 보살님은 처음인지라 기분이 좋았다. 대웅전 불보살님께 삼 배를 올리고 절을 둘러보았다. 보살님께서는 내가 낯선 곳의 어색함에 불편하지 않도록 편안하게 대해 주셨다. 보살님의 친절을 고맙게 여기면서 시선과 발길을 옮기던 중 깔끔한 복도 벽에 붙은 참선
새벽 3시30분. 이 시간이 되면 나와 도반들은 한결같이 ‘법화경’ 독송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 한 품씩, 각자의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공명의 힘을 느낀다. 오늘도 감사로 충만한 새벽의 문을 연다.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정진을 이어간다는 것은 소중하다. 함께하는 도반이 있어 고맙고 더불어 실천할 수 있어 감사하다.돌이켜보면 세상의 풍파는 모질었다. 그래도 그때마다 나의 손에는 ‘법화경’이 있었다. 힘들다, 벅차다 싶을 때는 ‘법화경’을 펼쳤다. 어떨 때는 철야 정진을 하며
‘코로나19가 어서 소멸이 되게 하소서!’ 진정으로 온 국민이 간절하게 염원하는 요즈음의 기도 제목이리라. 이렇게 나라와 국민이 일상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기도해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오늘은 유난히 장맛비가 폭우가 되어 내리고 있다. 나에게는 장마가 가져다준 선물 같은 평온한 밤이다. 비로 인해 가게도, 집도, 찾아오는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겨 침묵으로 가득한 공간을 음악으로 채운다. 직장과 결혼으로 분가한 아들들이 남겨 놓고 간 공간을 요즘은 도반들이 사랑으로 자비심으로 가득 채워줘서 소소한 행복이 가득하다.오늘도 감사하는 마음으
미타선원 행복선명상상담센터 사라수 선생님과의 명상 수업을 통해 비로소 내 안에 있던 이야기들을 시작하게 되었다. 마치 깊은 산속 샘의 물길을 찾은 것 같은 기분, 명상하고 나눔을 할 때마다 그렇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같이 공부하던 도반들에게 부끄러울 정도로 펑펑 울기만을 한참 동안 했던 것 같다.그러한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난 후 어느 때인가 나의 어린 시절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지도해주시는 선생님께서 “참 외로웠겠구나”하는 한마디가 배를 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으로 다가왔다. 한동안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이 무척 불쌍하게 느껴졌
학창시절 가정환경 조사할 때 종교를 물어보는 질문이 있었다. 그때마다 늘 ‘불교’라고 답을 했다. 사실 대답은 불교라고 했지만, 절에 가본 기억이라고는 수학여행 때 들렀던 불국사와 법주사가 전부였다. 답을 했던 이유는 어머니께서 절에 다니셨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불교를 잘 몰라도 불교를 믿는, 무늬만 불교인 생활을 꽤 오랜 기간 이어왔다. 부처님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결혼하고 나서부터다. 당시 심산 스님께서 주지를 맡아 계시던 통도사부산포교원(현재 불지사)에 어머니께서 꽃꽂이 강좌가 있다고 배웠으면 좋겠다고 제안해 주셨다. 그렇게
아버지의 정성과 열정으로 완성된 반야심경 병풍은 어머니의 제사를 모시는 남동생에게 가보로 전해졌다. 동생이 병풍을 차에 실어가던 날, 자동차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의 그 뭉클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이었다. 한 자 한 자에 깃든 아버지의 노고와 정성을 떠올리며 존경심으로 충만해진 순간이었다. 이번 기제사 때는 저세상 어머니께서 얼마나 행복해하실지 얼마나 고마워하실지, 또 오히려 아버지께서 더 행복해하실 상상을 하니 그날이 기다려지기까지 한다.아버지의 서예 선생님께서도 불과 4개월 동안 배우고 쓴 작품이라고 믿기 힘들다며 큰 격려를
자식의 진학을 위한 간절함으로 부처님께 기도를 시작하게 됐다. 진정 간절함의 크기에 비해 진실한 기도를 했는가 돌이켜보면 뉘우칠 만하다. 여러 번의 진학 실패로 괜한 원망을 하면서도 내 나름의 최선의 방도가 기도라 여기면서 또 부처님께 의지했다. 결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고 내 자식 일이 꼭 진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기에 기도는 이어졌다.그 와중에 급성암으로 어머니께서 세연을 다하시게 되었고, 49재를 대광명사에서 지냈다. 장례식장에서부터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간절히 해주신 스님과 불자님들의 열의에 깊은 감명도 받아 나 역시
그동안 사경했던 ‘법화경'까지 봉안하면서 사경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정말로 발원하는 대로 생각하던 대로 이루어졌으니, 평소에 어떤 일이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설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추구해 나가야 할 것 같다는 희망도 발견했다. 혼자 하는 사경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도반들과 더불어 하는 사경은 정말 신심이 솟아나는 과정이며 많은 선지식을 만나는 과정이며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활동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이렇게 선원에 몸담고 사경을 한 이후로 점점 더 장엄한
통도사포교원 장유 동림선원의 불자다. 아름다운 불모산 자락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장유계곡, 그리고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동림선원과 인연을 맺은지 2년이 되어 간다.동림선원에서는 금강경 사경반을 운영하고 있어 많은 도반과 함께 사경을 하고 있다. 동림선원은 사경을 ‘부처님의 말씀을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에 옮겨 쓰며 실천하는 수행’으로 소개한다. 사경반의 지도법사인 천조 스님께서는 사경에 대해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사경은 법신불을 조성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스님들이 선방에서 정진하듯이 온 마음 온 정성을 다해 부처님 말씀에 정성을 기
이왕이면 자주 절에 가고 싶어서 집 근처 여여선원으로 새벽기도를 다녔다. 하지만 3년 기도를 회향하던 날 남편은 “새벽에 절에 가는 것을 끝내면 안 될까? 새벽에 외출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니까 집에서 기도하면 좋겠다”라며 불편해 했다. 남편의 부탁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동참하던 절 봉사활동도 결국 남편의 요청에 그만두게 되었다. 함께 사는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나만 좋자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해결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곰곰이 나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내게 고민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은 부처님 도량에 걸음을 하고 부처님을 공부한 일이다. 불법을 만나고 명상을 한 덕분에 이번 코로나 태풍 속에서도 마음 들뜨지 않으며 지낼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뉴질랜드에 사는 친구가 전화로 내게 물었다.“친구야, 너는 어쩜 그리도 지루해하거나 외롭지 않게 집에서 생활을 잘하니?” “응. 그것은 바로 부처님 만나 수행하고 기도한 덕분이지. 너도 해볼래?”이렇게 누구에게든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코로나 극복의 비결은 바로 명상수행이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공고되기 전부터 스스로 밖으로
나는 기도를 하루도 놓지 않고자 노력했다.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하는 당일에도 새벽에 종교실을 찾아 기도했다. 한 보살님의 권선으로 남편과 함께 ‘법화경’ 사경을 했고 인연이 닿아 몇몇 사찰에 대중공양을 올리는 공덕도 쌓을 수 있었다. 특히 지난해 일년 동안은 현의 스님의 도반이신 동찬 스님께서 매주 명상수업을 진행하셨는데 이 수업의 총무를 맡아 봉사도 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쉬고 있지만 매달 진행하는 학촌사 사찰 탐방에도 동참하고 있다.지난 3년 동안 기도하면서 나는 불보살님의 가피를 크게 세 가지 받았다고 믿는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은 종교가 없었다.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간식을 받으려고 교회에 간 기억은 있지만 절에는 부처님오신날조차 가본 기억이 없다. 가정환경 조사서의 종교란에는 늘 ‘무교(無敎)’라고 적었다. 종교가 있어야 한다거나 어떤 종교가 좋다는 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대학교 1학년 때, 천주교 신자인 외숙모의 권유로 영세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성당에 간 것은 절실한 믿음보다는 미사포나 영성체 같은 미사에 대해 갖는 동경과 내가 살던 동네 성당의 보좌 신부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