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부터 금년 밀레니엄 시대를 앞두고 외국의 주요 언론에서 지난 1000년 동안 인류문명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사건을 조사한 결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인쇄술발명이 1위로 선정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금속활자본 《직지》를 간행하는 등 인쇄술을 발명하여 세계 인쇄문화를 선도적으로 이끌어 왔다. 《직지》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금속활자본이면서도 아직까지 세계인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것은 이 책이 우리나라에 있지 않고 《직지》 하권만이 유일하게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정부차원에서 프랑스 정부측에 수차례에 걸쳐 반환 또는 원본의 임대전시를 요구하였으나 지금도
생각해 보면 난 참 부처님과의 인연이 전생서부터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든다. 얼마 안 있으면 50을 바라보는 나이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중학교 2학년때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근처 `봉원사'절을 찾곤 했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교통도 좋지 않았다. 누가 나를전법(轉法)한 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 부처님이 좋았다. 향냄새가 좋고 목탁소리가 좋고 스님이 독송소리가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아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좋은 부처님법을 만난 것에 매일매일 감사기도를드린다. 더구나 남편 역시 나 못지 않게 불심이 깊다. 바쁘고 피고한 생활속에서도 불교대학원을 열심히 다니고 있는 남편을 보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또 교수님께 좋은 강의를 듣고 온 날에는 나에게 알기쉽게 불법
언젠가부터 집에 뻐꾸기 시계 하나쯤 걸어두는 것이 유행인듯한 때가 있었다. 정말 흡사하게 "뻐꾹"하고 우는지 웃는지 아무튼 신기해한 적도 있었는데 이번에 모 방송국 창사 특집극으로 뻐꾸기의 한살이를 관찰한 것을 방영했었는데 가슴 뭉클했었다. 뻐꾸기 부모의 자식기르기가 여느 인간이나 동물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데 한번 놀랐고 그것보다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온통 머리만 큼지막하고 온몸이 빨간 그 괴물같은 뻐꾸기 새끼가 벌이는 행동이야말로 어떤 법사님의 법문 한구절보다도 가슴을 찡하게 만들고 말았다. 아무리 본능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그럴수가 있는지… 처음부터 뻐꾸기 어미가 떨어뜨려준 둥우리 즉, 그곳은 뱁새부부가 알을 품으며 정답게 살고 있던 뱁새 둥우리 였는데, 느닷없이 뻐꾸기란 놈이 자기알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느날 영산회상에서 대중들을 향해 연꽃을 들어보이셨습니다. 이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대중이 부처님이 든 연꽃 한송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을 때, 한켠에 앉아 있던 제자 마하가섭 만큼은 그 뜻을 알아 듣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 합니다.” 지난 12일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이날 부처님의 ‘염화미소’를 전강법어 첫 머리에 올린 남주혜남(南洲慧南) 법주사 강주스님은 자신의 제자 철운(撤雲)·지우(智雨) 스님에게 법을 전하는 전강식을 가졌다. 전강식에 앞서 12시 30분 법주사 대웅보전에서는 혜남-철운-지우 세 스님이 강맥을 전하고 받는 의식을 갖기에 앞서 역대 강백과 조사들에게 이날의 전강을 고(告)하는 헌공의식이 진행됐다. 경건한 마음과
우리의 진여성품(진여성품)은 우주와 하나됨이다. 우주공간의 온갖 기를 머금고 장양(長養)된 생기가 넘치는 음식물을 취할 때 우리는 만족하며 기뻐한다. 우주의 함축된 기가 내몸의 세포를 이루며 너와 내가 하나가 됐기에 내 몸밖으로 찌꺼기를 내보낼 때 우리는 또한 만족하며 기쁘다. 우주의 지(地) 수(水)화(火) 풍(風)으로 내몸 속의 일부가 환원됐기 때문에 하나되어 기쁘다. 우리는 이성과 사랑할 때 무아지경의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 고대인류로부터이어져 내려온 인종의 씨가 미래인류와 계합하여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체로 이어지기에 우리는 우주와 하나되어 만족하며 기쁘다. 우리는 왜 슬퍼지는 걸까? 지존하신 부처님의 적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부처님같은 절대적인 존재임을 망각하고 상대적인 비교
매주 월요일 아침 10시면 나는 간편한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배낭을 메고 수유리에 있는 국립재활원을 향해 84번 버스를 탄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하반신을 쓰지 못하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서 재활의 꿈을 다지며 열심히 투병생활을 하고있는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서다. 병실마다 다니며 목욕도 시켜드리고 빨래며 침상정리며 손톱발톱까지 깎아주며 지내온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지금으로부터 2년전 1993년 12월에 불교간병인협회에서 간병인 교육을 받고 보훈병원에 입원해있는 할아버지 환자들을 위문방문하다 지금은 국립재활원에서 환자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한여름엔 땀이 비오듯 쏟으면서 환자들은 줄을서서 자기들의 차례를 기다린다. 그럴때면 마음껏 뛰어다닐수 있는
5대 적멸보궁을 순례하기 위해 한 사찰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매표소에서 같이 간 5명 모두가 조계종 신도증을 제시했는데도 입장료를 모두 내야 한다고 했다. 조계종 사찰이면 신도증을 제시하고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막무가내로 내야 한다기에 어쩔 수 없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옆에서도 신도증을 제시하고 시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 씁쓸했다. 돌아오는 길에 상원사에 들렀는데 그 사찰과는 달리 입장료를 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전국 어디를 가나 신도증을 제시하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유독 그 사찰만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유가 있다면 ‘조계종 신도증이 소용없다’는 안내판을 걸어놓아야 시비라도 없지 않을까 한다. 인터넷 독자 김운태
나의 어머니는 의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다. 언젠가 모 방송 프로그램에 귀신을 쫓는다는 스님이 나오는 것을 보고 치료를 위해 찾아간 일이 있다. 500만원 가까이 시주하고 치료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기라는 판단이 들어 고소까지 한 끝에 시주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이 요즘 모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항의전화에도 불구하고 모 방송은 그 프로그램의 방영을 계속하고 있다. 참된 수도자의 길을 가고 있는 스님들을 위해서라도 종파도 분명치 않은 자칭 스님이라는 사람들을 근절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인터넷독자 박재영
며칠전 학생들을 데리고 지리산을 갔다가 아는 스님이 있는 절에 들렀다. 그곳에서 필자는 사찰이 잡풀로 덮여 있는 아쉬운 광경을 보았다. 스님은 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땅을 활용하는 시간에 다른 것을 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것이었다. 스님의 말을 현실적으로는 받아들였지만 백장 선사의 정신이 소멸해 가는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 같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땅을 활용하는 것은 경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수행의 관점에서 해야 하는데, 점점 수행의 정신이 소멸해 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요즘 ‘육신을 편하게 하고 명예를 얻으려는 분위기는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승려는 삼계출가(三界出家)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 정신은 먼저 일상생활에서 걸림이 없어야
최근 많은 사찰에서 일반 재가불자들을 위해 ‘영탑’을 조성하고 있다. 불탑을 본뜬 것부터 옛 선사들의 부도를 모방한 것까지 모양도 다양하다. 매년 여의도 3배 면적이 묘지로 없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사찰의 영탑 조성은 정부의 화장제도 장려와 맞물려 바람직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또 부처님 성전에 유골을 모실 수 있다는 점에서 재가불자들에게 적지 않은 기쁨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최근 사찰에 조성되고 있는 ‘영탑’은 불교의 근본 전통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부도는 깨달음을 얻었던 조사 스님들의 사리를 모셨던 곳이다. 탑을 ‘불탑’, 부도를 ‘승탑’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제 대비루의 상량도 끝나고 지붕에 개와를 덮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어느 날, 영은사에 진승상의 관아로 부터 네사람의 집사와 하인 20명이 들이닥쳤다. 그 까닭은 이러했다 . 진승상은 원인 모를 불로 타버린 각천루의 복원을 위해서 집사들을 재목점에 보내서 나무를 구해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집사들이 고을 안팎의 재목점 10여 곳을 찾아갔으나 모두가 나무를 영은사 대비루 중건에 시주하고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보고받은 진승상 "영은사의 대비루를 중건하는데 목재가 무한정으로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안, 진순, 진지, 진명, 너희들 넷이 영은사에 가서 나무를 빌려달라고 해라. 내년에 황제로 부터 재목을 하사 받아서 갚겠다고 해라"하였다. 그리고 다시 다짐하기를 "영은사의 스님이 빌
본지 고문을 역임한 한양대 리영희 명예교수는 지난 8월 9일 한국전쟁 당시 신흥사의 경판·보제루 등 성보 훼손을 막은 공로로 만해 실천상을 받았다. 리 교수가 8월 19일 본지에 보내온 불교계에 대한 감사의 글을 게재한다. 나는 대한불교와 조계종에 대하여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자 이 글을 적습니다. 8월 9일 강원도 백담사에서 집행된 수상자에서 나는 뜻밖에, 그리고 분수에 넘치는 제4회 만해상 6분야 중의 ‘실천상’을 수여 받았습니다. 수상자 소감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72세의 이 나이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미몽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민족이 우러러보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에 값하는 일을 한 것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한용운 선생이 어떤 분이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아빠가 일찍 들어오신다. 다른 날은 약주도 드시고일 때문에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 많은데 이날만은 일찍 들어오신다. 매주 금요일은 우리가족이 모두 모여서 가족법회를 여는 날이다. 아빠는 우리들에게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일찍 퇴근을 하시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생인 나는 아빠가 일찍 들어오시는 것이 좋고 또 부처님 말씀을 들어서 좋다. 가정법회는 엄마가 제안하셔서 시작됐다. 처음 가정법회를 하자는 엄마의 제안에 동생과 나, 아빠는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금요일에 아빠가 늦게 들어오실 때도 있었고 가정법회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나도 학원갔다가 여러가지 이유로 늦게 올때가 많았다. 난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우리가족이 일주
어려운 삶을 살아오면서 세 아이의 뒷바라지는 정말 힘겨울 때가 많았다. 그럴때마다 어떤 은신처로 피하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 간절했다. 그때 문득 무슨 종교든 믿음을 갖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던 중 막내의대학 진학을 앞두고 결심한 종교가 '불교'였다. 큰딸의 자문을 얻어 선택한 나의종교 '불교'. 우리의 선조들이 토속신앙과 더불어 민족의 종교로 번창해 온 불교이기에 마음이 더 이끌렸다. 처음 몇 년간은 사찰에 합창단원으로 열심히 다니며 부처님께 기도 정진드렸다. 철야기도를 하며 소원성취를 비는 등, 기복에 기대어 부처님께 관세음보살님께 닥치는 대로 매달렸다. 닥치는 대로 매달릴수록 크게 이루어지는 것은 없고몸만 고달프고 삶은 짜증스럽기만 했다. 이상
국민소득 1천불이상을 넘어서 한국도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였다고 야단이다. 아프리카, 서아시아에서 기아로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우리도 잘사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생활의 양적인 향상과 더불어 문화시민으로서 공중도덕과 질서의식의 선진화가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버스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보면 주부인 내가 봐도 아직 선진화와는 거리가 먼 것같다. 달리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떠드는 사람들, 학생 주부 할 것 없이 차의 소음과 함께 외쳐댄다. 특히 버스운전기사의 자기 취향에 맞는 라디오 채널 선택은 정말 짜증나게 한다. 지하철 시대도 10년이 지났는데 타고 내리는 안내방송은 꼭 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시 된다. 한국말은 느리고 영어는 빠른 편이다.
오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교계는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을 위한 경사로 설치, 시낭송회, 야유회, 등반대회 등 다채로운 장애인 관련 행사를 연다. 조계종 총무원(원장 월주스님)은 장애인의 날을 맞아 20일 오전 조계사 총무원 청사에 경사로를 설치한다. 또 장애인 문학창작활동 지원을 위해 시낭송회도 갖는다. 이 행사를 마련하는 총무원 문화사회부는 모든 사찰에 장애인을 위한 경사로등의 시설이 설치되어 편리하게 종교시설을 이용하고 부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함에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문사부측은 총무원의 모든 시설 그대로 두고 경사로를 간이 철 구조물로 제작, 설치할 계획이다. 이 경사로는 필요에 따라 용이하게 철거 및 설치할 수 있는 구조물로 제작된
#1 전라도 어떤 산사에서 행자로 지내던 시절 이야기다. 얼굴빛이 유난히 검고 농사꾼처럼 생긴 사무장이 있었다. 그는 우직하고 단순해서 주위사람들에게 답답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곤했다. 그에 비해 스님은 학승으로 이름이 높고 성격이 아주 예민한 분이셨다. 나는 그 스님 밑에서 행자생활을 하게되었다. 하루는 스님이 서울에 올라가시며 나에게 당부하셨다. “아침에 고추밭에 물주고 점심 때 나무를 해라.” 나는 스님을 배웅한 후 공양간 설겆이와 경내 청소를 마쳤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아침 나절, 연녹색 미루나무 잎새들이 팔랑거리며 바람에 헤살짓는 것을 보노라니, 내 마음도 싱숭생숭했다. 출가를 결심하고 이 절 저 절을 떠 돈지도 어느 새 한 해가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잡념
올해 부처님오신날이 가까워 올수록 나의 가슴 속에는 슬픔이 물처럼 차 오르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이 이리도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지난 1월에 유명을 달리하신 친정아버님 생각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매년 부처님오신날이면 나는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절에 갔다. 두 분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나 탱화를 그리며 불교에 귀의한 딸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다른 날도 아닌 부처님오신날이면 꼭 함께 절엘 가 주셨다. 그래도 불자가 아니고 타종교인이라는 점은 마음에 걸리셨는지 두 분 모두 절에 가게 되면 굉장히 어색해 하셨다. 아버님은 젊었을 때부터 몸이 자주 안 좋으셨다. 5년 전부터 건강이 더 나빠지셨는데 지난해에 결국 병원에서 간암 통고를 받았다. 연로하신 아버님에게 간암은 일종의 사형선
부처님 오신날은 모든 불자들의 축제다. 부처님께서는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진리의 길, 인간의 길을 일러주셨기 때문이다. 요즘 초파일 행사를 생각하면 먼저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리는 대규모 봉축행사를 비롯해 남녀노소가 각양각색의 연등을 들고 광화문네거리를 행진하는 모습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초파일 때면 등장하는 해맑은 동자승들의 천진난만함도 더 이상 낯선 풍경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가 맞는 초파일 모습이 예전의 초파일 행사와는 크게 다른 듯하다. 먼저 초파일이 공휴일로 제정된 것이 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였고 불자들이 전체적으로 모여 대규모 행사를 갖는 것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각 사찰의 능력에 맞게 봉축행사를 열거나 동네를 행진하는 소규모 행사가 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있었던 20년 전(1980년)의 부처님 오신날은 내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5·18 발생 3일 후인 5월 21일(양력)이 부처님 오신날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날이 진압군에 의해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날을 가리켜 일명 ‘피의 초파일’ 초파일로 부르기도 했다. 나는 당시 제주도 관음사의 주지를 맡고 있던 중이어서, 광주의 처참한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 다만 풍문으로 흘러오는 끔찍한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은사 스님이 계시던 문빈정사에 전화를 하거나 여기 저기 인연 있는 곳에 연락을 취해 그곳의 참상을 전해 듣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때마다 부처님 오신날의 민중학살이라니 … , 민중이 저렇게 죽어가고 억압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