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좌와(行住坐臥)’ 즉 ‘걷고, 서고, 앉고, 눕는 네 가지 자세에서도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은 불교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자주 오해된다.얼마 전 한 불자님이 말했다. 좌선을 하다가 다리가 너무 아파서 힘들었는데, 그럴 땐 편하게 다리를 풀고 명상하거나 걷기 명상을 해도 된다는 지침을 들었다고 했다. “앉아 있다가 다리가 아프면 누워서 해도 된다더라” “앉기 힘들면 그냥 걷기 명상하면 된다”는 말은 얼핏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 것 같지만, 사실 본뜻에서 크게 벗어난 해석이다. 행주좌와란
11월의 하늘은 유난히 깊고 투명하다. 밤이 되면 차가운 공기 사이로 별빛이 또렷하게 살아난다.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마치 모든 소리를 삼킨 듯 적막하다. 그 고요 속에서 유난히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별을 바라본다. 싯다르타는 저 별빛 한가운데에서, 있는 그대로 비추는 생명의 참된 성품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아득한 빛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깨어 있는 마음의 성품 안에서 반짝이고 있는 셈이다. 우주를 가로질러 온 그 오래된 빛은, 나라는 경계를 녹이고 모든 생명을 하나로 잇는다.138억 년 전 빅뱅으로
금빛 들녘의 풍요 뒤 찾아오는 서늘한 공기 속에 그리움마저 묻어나는 계절, 가을이다. 가을 햇살은 오래된 연애편지처럼 따뜻하고 설레지만, 한 줄기 바람에도 마음은 낙엽처럼 흩어지며 바스락거린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유난히 ‘외로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심리학에서는 외로움을 ‘관계에 대한 질적·양적 기대와 현실 경험의 불일치에서 오는 주관적 정서 경험’이라고 정의한다. 사회적 관계망의 부족이나 단절로 인한 사회적 외로움, 깊은 정서적 유대의 부재로 인한 정서적 외로움, 그리고 인간 존재 자체의 고립감에서 비롯된 존재적 외로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나뉘어 있다. 언어와 인종, 종교와 사상,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벽이 높다. 그러나 경계가 있는 곳에 길도 있다. 그 길 위에 서서 서로의 세계를 이어주는 이들이 있다. 두 개 이상의 집단·조직·문화·체계의 경계(boundary)에 서서 정보를 매개하고 관계를 조정하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바운더리 퍼슨(boundary person)’, 곧 경계인이라 부른다.경계에 선 사람은 한 진영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중심보다 ‘사이’를 산다. 그래서 때로는 양쪽으로부터 “너는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출가 전 나는 사업 때문에 매우 바쁘게 살았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그 와중에도 은사 스님께서 어떤 일을 하신다고 하면 내 일보다 스님의 일을 우선으로 도왔다. 내 일정을 미루고 절에 가서 일을 돕고 돌아오는 날에는 마음이 한결 즐거웠다. 게다가 사업에 오히려 좋은 일이 생기곤 했다.돌이켜보면 그러한 노력들이 수행의 가장 큰 뒷받침이 되어주었다. 물론 사람들을 돕다 보면 마음속으로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 스님의 가르침대로 그런 번뇌를 잠시 옆에 두고, 늘 최선을 다하고자 애썼다
가을은 자연이 잠시 멈추어 서는 계절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낙엽 밟는 소리 속에서 마음은 천천히 속도를 늦춘다. 세상이 잠시 숨을 고르는 이 계절, 나 또한 진정한 내면의 쉼 속으로 한 발 더 다가가 본다.‘휴식(休息)’이라는 글자를 보면,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자신의 마음을 본다는 뜻이 숨어 있다. 결국 쉼이란 외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진정한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멈추지 못한다. 나도 모르게 손끝은 폰 화면을 스크롤하고, 누군가의 ‘좋아요’에 안도하며 반응에 마음이 출렁
직원 중 한 명이 암 진단 5년을 맞아 흔히 ‘완치’라고 하는 완전관해 판정을 받았다. 자신의 소회를 밝히며 울컥하는 모습에 다들 축하의 마음을 전했다. 최근 템플스테이에서도 암 진단을 받았거나 항암치료 중인 참가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들과 인연을 맺고 있는 나 역시 처음 암 진단을 받은 날이 벌써 20년 가까이 되어 간다. 그 사이 수술과 치료, 검사, 회복 등 과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지금도 매일 항암제를 복용하며 살고 있다.우리는 누구나 암이라는 병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다.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매년 신규
며칠 전 출연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작가님이 “나이가 들면 왜 시간이 빨리 가는가”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반백 년을 넘기면서부터 당연히 공감되는 이야기라 호기심이 생겨 몇 가지 이론을 찾아보았다. 프랑스 철학자 폴 자네는 ‘한 해가 인생에 차지하는 비율’로 시간의 체감 속도를 설명했다. 다섯 살에게 1년은 자신의 인생 전체의 20%이지만, 쉰 살에게는 단지 2%에 불과하다. 나이가 많을수록 각 해가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이 작아져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낀다는 것이다.신경학적 측면에서는 뇌의 정보 처리 속도의 변화를
출가하자마자 영화 스님께서 나를 한국으로 보내셨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지만, 사미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누군가 “선생님이라 불러야 합니까, 아니면 스님이라고 해야 합니까?”라고 묻기라도 하면 괜히 마음이 상했다. ‘내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는데 왜 그런 걸 묻지?’, ‘승복이 다르다고 무시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청주 보산사가 문을 열고 선명상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출가하지 않았다는 이유, 큰 종단 소속이 아니라는 이유였
계절이 흐르듯 사람의 마음도 흐르고 변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느끼고 이해하려 애쓰며, 공감을 통해 진정한 연결을 꿈꾸기도 한다.인류가 다양한 표정을 가지게 된 것은 타인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 덕분이라고 한다. 몸집에 비해 뇌가 크게 발달한 것도 타인의 마음에 반응하기 위해서였다. 타인을 마음에 들이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존중하려 애쓰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다움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기 위해 진화해 온 존재라 할 수 있다.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말보다 앞선 언어로서의 얼굴과 몸
2023년 9월 3일 공식적으로 출범한 ‘파도봉사단’이 어느새 창립 2주년을 맞이했다. 낙산사 템플스테이 체험형 프로그램 참가자를 대상으로 모집한 이 봉사단은 현재 가입자 1000명을 돌파하며 템플스테이 시스템의 새로운 모델을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파도봉사단을 기획한 데에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사찰에서 하루 머무는 데 그치지 않고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제2의 고향’을 마련해 주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전법의 장을 열고자 함이었
며칠 전 한 신도분께서 “머그잔 필요하세요?” 하고 물어 오셨다. 그분의 성의를 거절하는 게 마음에 걸려, 감사히 잘 쓰겠다고 말씀드렸다. 약속한 날 그분이 가져오신 유리잔을 보는 순간, 거절하지 않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마음에 들었다. 다름 아닌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의 상징인 ‘반가사유상’을 주제로 국립중앙박물관과 대형커피체인점이 협업하여 만든 특별한 유리컵이었다. 마치 유리로 된 세계의 고요한 안개 속 연못 위로 반가사유상이 머물고 계신 느낌과 같았다. 차를 마시기 위해 유리잔을 들면 그 아래에 사유의 부처님이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명상에 대한 관심 분명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상은 절에서 배우는 선(禪) 명상이 아니다. 앱이나 유튜브, 요가 스튜디오를 통해 접하는 ‘마음챙김(mindfulness)’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챗지피티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이렇다. “젊은 세대는 종교성이 배제된 안전한 자기관리법을 선호한다.” 풀어 설명하면 절이나 스님이라는 존재는 종교 제도의 일부로 인식되고,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거나 ‘절차와 위계에 복종해야 한다’는 짜여진 구조에
아침 일찍 산을 오르면 바람이 참 시원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흐르는 바람은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고, 풀잎 끝에 맺힌 이슬은 마치 밤새 숲이 내쉰 깊은 숨결처럼 고요하고 맑다. 자연이 낮 동안 흡수한 열기를 조용히 식혀내고 있는 듯하다. 낮에는 그토록 뜨겁던 공기가 어디로 갔는지, 새벽이 되면 숲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 호흡을 회복한다. 자연은 늘 헐헐 통하고, 시원하며, 순환하는 숨결을 품은 존재다.하지만 도시로 내려오면 풍경은 전혀 다르다. 시멘트 위에 붙잡힌 열기는 밤이 되어도 식지 않고, 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
이례적인 폭우와 폭염이 이어진 7월을 지나, 해변의 모래마저 녹일 듯한 본격적인 여름휴가 시즌이 한창이다. 국토교통부 조사에 따르면 올여름 국내 여행을 계획한 이들이 79%에 달했고, 그중 동해안이 가장 인기 있는 지역으로 꼽혔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휴가의 의미로 ‘충분한 휴식과 힐링’이 가장 많았고, ‘스트레스 해소 및 재충전’이 그 뒤를 이었다. 최근 10여 년간의 추세를 보면 체험과 힐링, 혼자 떠나는 여행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늘고 있다.낙산사템플스테이는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 작년 여름 ‘서핑템플스테이’를 선보였고, 올해도
우리 속담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이 있다. 자식이 많으면 걱정이 끊이지 않듯, 우리의 뇌도 이 속담 속 나무와 닮았다. 뇌 속에는 무수히 많은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되어 신경망인 시냅스(Synapse)를 형성한다. 시냅스는 나무의 가지처럼 이해할 수 있다.그런데 가지가 너무 많으면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고, 심할 경우 뿌리마저 흔들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뇌 안에 불필요한 시냅스가 지나치게 많으면 외부 자극에 과도하게 반응하거나, 특정 생각이나 감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고 다양한 심리적
서울 종로 조계사 맞은편에 작은 선원이 문을 연다. 이름은 보화선원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고등학생 시절 조계사를 찾았을 때, 한 불자님이 법요집을 건네주셨다. 당시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던 나에게, 그분의 따뜻한 보시행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법요집 속 반야심경을 외우고 마음에 새기면서, 불교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이 살아났고, 언젠가 배우고 싶다는 갈망도 자라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인연이 내 안에 대승의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시 조계사 앞으로 돌아왔다.
숨결 하나에도 열기가 실려 오는 한낮, 지구가 뜨거운 열을 안고 조용히 신음하는 듯하다. 이런 날들이 계속되니 우리는 먼저 안부부터 묻게 된다. 몸은 별 탈 없이 무사하신지? 마음은 또한 여여하신지?어느 시인이 여름은 ‘열음’이라고 표현했다. 창문을 열고, 옷깃을 열고, 가슴마저 활짝 여는 계절. 기후의 언어가 점점 거칠어 가는 시대에도 여전히 선선한 마음을 지니고자 애쓰는 시인의 마음이 전달된다.습도가 높아 옷이 몸에 달라붙는 날, 오랫동안 넣어두었던 모시 삼베 풀 옷을 꺼내 손질해 본다. 천 한 조각씩 꾹꾹 누르기도 하고 옷깃의
도시고속도로에서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갈 때 있었던 일이다. 긴 대열을 비집고 끼어든 차량에 뒤차가 경적을 울렸다. 양보로 상황이 끝나는 듯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일반도로로 진입하며 속도를 낼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좀 전에 끼어들었던 차량이 차선을 넘나들며 양보하지 않았던 차 앞에서 급제동으로 멈춰 섰다. 보복운전이었다. 언성을 높이며 차문을 박차고 나오는 두 운전자를 지나 목적지로 향하느라 보지 못했지만, 이후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었다.운전하다 보면 과속, 신호위반, 불법주차, 난폭·보복운전도 흔히 목격된다. 그래서 그럴까
강연을 다니다 보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질문을 받곤 한다. 흔히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성선설이나 성악설, 그리고 원죄나 업의 개념으로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정의하려면 먼저 어디까지를 본성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필요하다.불교에서는 인간의 성품을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으로 나눈다. 표층의식인 제6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심층 무의식인 제7식(말나식)과 제8식(아뢰야식)으로 구분된다. 즉, 인간의 본성은 어떤 의식의 차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제6식인 의식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성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