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대웅전 삼신불(노사나불) 1757년 作. “조선조 3대가의 한 분인 의겸 불모의 솜씨로써 매우 훌륭한 불화이다. 불화 그리는 이들이 반드시 참조해야 할 불화라 하겠다.”(한국의 불화 12. 202쪽) ‘선암사 감로도’ 걸작 석정 스님이 ‘반드시 참조해야 할 불화’라고 극찬한 그림은 ‘선암사 서부도전 감로탱화’〈사진〉다. 1736년 7월 의겸 스님이 9명의 화원을 이끌고 조성한 이 감로도는 짜임새 있는 구도는 물론 현실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명쾌하면서도 부드러운 색조를 보여주고 있다. 원색을 주로 사용하면서도 진홍색과 녹색의 보색대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간간이 사용한 흑백색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전체적으로 밝은 화면을 선사하고 있다. 안귀숙 씨
운흥사 괘불. (1730년 作) 의겸 스님은 ‘운흥사 괘불’(보물 1317호)을 조성한 스님으로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3대 화승 중 한 명이다. 의겸 스님의 생몰연대와 출생지, 출가 인연 등은 자료가 없어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학계에서는 의겸 스님이 남긴 작품 중 초기 작과 말기 작을 기초로 생몰연대를 1690년경부터 1760년경 까지로 유추하고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유추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다. 화승의 길을 걷는 데는 적어도 세 단계의 기간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中 명대 ‘절파’ 화풍 수용 첫 단계는 출가 후 당대 화승 문하에서 수업을 받는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당대 명화승의 초를 연마한 후 스승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수업을
한 폭 삼장도 유행 깨고세 폭 삼장보살도 제시화면 상단 권속 다수 배치부채꼴형 도상 주로 애용 녹-적색 사용하면서도붓터치로 맑게 표현건장·둔장한 본존 지양세련미 배인 문양 일품 통도사 대광명전 노사나후불탱화. ‘운문사 비로전 삼신불회도’(1755년), ‘삼장보살도’(온양민속박물관 소장·1755년), ‘통도사 대광명전 삼신불회도’(1759년)는 임한 스님의 대표작으로써 당시 필력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시사해 주는 작품이다. 현재 온양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장보살도’(천장·지장·지지보살)의 화기 일부분은 파손돼 있지만 작품 중 ‘지지보살도’ 화기에 나오는 화승이 ‘운문사 비로전 삼신불회도’ 화기에 나타난 화승과 일치하고 있어 이 작품 역시 운문사에서 조성된
숙종→영조 40여년 활동‘기림사 삼장보살도’ 수화사천오 스님 문하서 공부하며본격 화승의 길 들어선 듯 10여년 화업 연마 후명작 ‘미황사 괘불’에 참여‘통도사 영산전 영산회상도’수화사 직 맡아 조성해 미황사 괘불.(1727년) 사진제공=통도사 성보박물관. 임한(任閑) 스님은 조선 숙종 말에서 영조 대에 걸쳐 약 40여 년 동안(1718년~1759년 활동) 경상도를 중심으로 화풍을 드날렸던 스님이다. 전통적인 도상과 함께 당시로서는 새로운 색채와 나름대로의 독특한 구상을 내보이며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화승이다.사실, 임한 스님의 행적은 자료가 없어 출생과 입적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기림사 삼신불회도’(1718년) 화기에 그의 법명이 처음으
우주만법 진리대자연과 맥 같이해오묘한 대화 통해자아를 발견해야 스승의 엄격한 가르침후학에 그대로 실천게으름 피운 제자나이 불문 바로 퇴출 물금포교당 독성탱. 덕문 1944년 作. 1990년대 초까지 활약한 월주 덕문 스님의 불화세계는 70년대에 접어들며 자리를 잡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 도상과 색채, 그리고 ‘목본금니채색불화’라는 새로운 기법의 불화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불국사 괘불(1973년 작), 공림사 신중도(1979년 작), 부산 칠성암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1970년대 작) 등의 대표작이 대부분 1970년대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구도를 보면 자연스러운 존상의 모습에 역동성이 서려 있어 기존의 불화에 비해 운동감이 활발하다. 더욱
지장탱. 1919년 완호 낙현 作. 월주 덕문(月洲 德文) 스님은 조선 후기 화승의 맥을 이은 금어로서 경상도 지역의 불화 맥을 계승했다. 특히 일본 유학 중 동양화 공부와 함께 서구미술까지 직접 접한 후 불교미술의 새로운 도상을 제시함으로써 전통불화제작기법은 물론 현대 감각의 데생이 적용된 불화의 세계도 보여준 인물이다. 13세 때 복천암 출가 부산 태생의 월주 덕문 스님의 집안 형편은 넉넉했지만 “속세에 살면 단명 한다”는 말에 그의 부모는 그가 부산공립보통학교를 수료한 직후 1925년 범어사 암자인 복천암으로 출가시켰다. 13세살의 어린 나이에 출가의 의미도 모르고 산문에 들었지만 첫발을 내딛은 복천암은 인생의 지침이 되어 주었다. 복천암은 1921년부터
범어사 팔상전 팔상탱. 명성 우일(明星 又日) 스님은 1910년 계룡산 아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922년 계룡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계룡산 동학사 성열(成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당시 최고 화승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보응 문성 스님을 친견하며 불화와의 첫 인연을 맺었다. 보응 문성 스님의 화소(畵所)에 들어가 습작을 시작한 명성 스님은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았는데 출초를 혼자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자 보응 스님은 “너는 내 수제자 일섭의 제자가 되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의 세연이 그리 길지 않았음을 직감한 보응 스님이 제자의 앞길을 위한 세심한 배려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부터 보응 스님의 손제자요 일섭 스님의 제자가 된 명
도림사 응진당 16나한도.(제 1·3·5·7·9존자) 1948년 作. 조선 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을 선포하며 우리나라의 사찰을 일본사원인 장충단의 ‘박문사’(博文寺)로 귀속시키려 할 때 불교계는 거세게 항거했다. 회광, 만공, 만해 스님 등은 31본산주지회의를 열어 만해 한용운 스님의 ‘조선불교의 개혁안’을 통과 시키며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했고,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연 후 각황사를 현재의 조계사(당시 태고사)로 옮겨 왔다. 태고사를 창건하며 ‘보천교 십일전’을 이전 개축하며 1938년 10월 총본산 대웅전 준공 봉불식을 거행했다. ‘항일’과 ‘독립’의 정신이 어려 있는 이 조계사는 당시 불교도 뿐 아니라 전 국민의 관심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상계사 대웅전 삼세불탱(석가모니불.1923년) 19세기와 20세기의 불화 전통 가교 역할을 한 화승을 한 분 꼽으라면 단연 금용 일섭(金蓉 日燮)스님이다. 금호 약효, 보응 문성의 맥을 이은 금용 스님은 마곡사를 중심으로 한 호서불화계는 물론 선암사 쾌윤(快允), 송광사 의겸(儀謙)과도 함께 일하며 호남 불화계의 숨결 까지도 고스란히 후대에 전해준 화승이다. 더욱이 불화뿐 아니라 개금, 단청, 조각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일섭 스님이 있었기에 쇠잔해 가던 근대불교미술이 중흥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응문성의 수제자 금용 스님은 1900년 12월 전남 화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갑병’(甲炳). 어린 갑병은 전쟁부터 불가와 인연을 맺어야
금호 스님의 수제자사실감 중시…산수화 일품단청-조각에도 뛰어나 어느 날, 고창 선운사 하늘에 화광이 솟자 이를 본 사하촌 사람들은 절에 불이 난 줄 알고 허겁지겁 모여 들었다. 그러나 선운사는 산사의 고즈넉함만을 간직하고 있었을 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고창 선운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관심이 쏠렸다. 당시 선운사에서 특별히 추진하고 있었던 불사는 단 하나. 바로 ‘선운사 팔상탱화’〈사진〉를 조성하던 중이었다. 이 불사의 도편수는 금호 스님의 수제자 보응 문성. 불사에 임할 때 회향일을 정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보응 스님은 마지막 붓을 놓을 때를 회향일로 잡았다. 보다 여법한 탱화를 조성하고자 했던 원력이 있어서일 것이다. 팔상탱화를 조성할 당시 고창 지역은
갑사 대웅전 현왕도. 마곡사 영은암 산신도. 금호 약효 스님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60대 초반의 대표작이라 하면 범어사 괘불과 범어사 나한전 16나한도, 갑사 대웅전 현왕도를 꼽을 수 있다. 이 세 작품에서도 ‘범어사 16 나한도’는 기존의 작품 양식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목된다. 인물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기법으로 표현했는데 배경 화면이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짙은 청록으로 그린 산수는 전체 화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언뜻 ‘나한도’라기 보다는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더욱이 용과 거북 등의 상서로운 동물과 갈지(之)자 형식으로 흘러내리는 폭포수와 반쯤 드러난 산들은 환상과 기괴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
정혜사 극락전 칠성탱화. 불화에 입문한 금호 스님은 예산 화암사에서 공주 마곡사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 본격적인 화원의 길로 접어들었다. 금호 스님이 마곡사로 거처를 옮긴 확실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불화에만 전념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예산의 작은 사찰보다는 정상급 사격을 갖춘 마곡사에 불사가 더 많을 것임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동서고금 대부부의 화원이 그러하듯 금호 약효 스님 역시 당대 선배 스님들과의 많은 교류와 다양한 불화를 접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조금씩 구축해 갔다. ‘화기’상에서 금호 약효 스님의 당호인 ‘금호’는 언제부터 보일까? 선사나 강백이 그러하듯 화승 역시 자신의 작품에 당호가 새겨질 정도면 그만큼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어느 정도
금호 스님 진영. 연재 ‘한국의 화승들’에서는 당대 화승이 남긴 업적과 여정의 길을 찾아봄으로써 법보신문 독자들과 함께 탱화가 선사하는 색다른 불심을 피워보고자 한다. 화승 선정에 있어서는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서 3대 혹은 4대의 맥이 통찰된 화승을 기준 삼았다. 그 이유는 현재 미술학계에서 ‘화승의 맥’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지만 사실상 초기 단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17세기 이전과 19세기 이후의 화승 맥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당대 화승 중 금호, 의겸, 임한, 고산, 월주 화승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편집자주〉 충청도서 활약 ‘계룡산파’ 구축 불보종찰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을 참배하며 정면과 측면에 봉안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