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주는 허공이 끝이 없기에 세계가 끝이 없고, 세계가 끝이 없기에 중생이 끝이 없고, 중생이 끝이 없기에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작용하는 형태도 또한 끝이 없다. 이러한 경계는 한계 지을 수가 없기에 우리 중생의 분별로는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중생은 자기 견해에 빠져 갖가지 오류를 범하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본의를 망각하여 또 다른 새로운 견해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작용은 한계가 없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일체중생을 인도하고 제도하여 주신다. 나아가 중생의 소질과 능력의 차이에 따라 온갖 방편을 제시해 주어야 하기에 본래의 진리의 몸을 나타내어 각각의 시공을 초월해 구제하시고자 보신과 화신으로 나투시어 응병여약(應病與藥)을 처방하여 인도하신다. 그래
인간은 삶의 주체로서 무한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만약 그 환경과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하면 고통을 지각하여 다른 환경을 찾아 헤맨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자기’라는 삶의 주체에 관심을 기울인다. 자기라는 실상을 객관화해서 보면 여러 인연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객체화된 진여임을 자각한다. 이 무한한 우주공간 중에서 지구라는 환경에 적응하여 행복해 보려고 하지만 제한되고 제약된 현상은 언제나 부조화를 낳는다. 왜냐하면 우리 중생은 홀연히 일어난 한 생각에 매몰되었기 때문에 지적능력과 현실상황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체계가 있는 이지적 사고활동으로 추리하고 분석해서 종합하여 판단해 보지만 언제나 해결하지 못하는 생활상의 문제들이 산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능력이 있
불교의 목적이 개별적으로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의 성취라고 할 때 현세와 내세를 관통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근본적 가르침은 자타(自他)와 시공(時空)·미오(迷悟)의 구별이 사라진 불이(不二)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본래 텅 빈 연기이기에 본질적으로 개별적인 독특한 특성이 사라지고 진여(眞如)의 작용만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법신(法身)이란 인격적 지혜의 작용이 자비로 나타난 보신과 화신이다. 이는 현세에서 근본 여리지(如理智)를 개발하여 여량지(如量智)를 체득할 때에 일체종지(一切種智)가 완성된 상태다. 이러한 완성을 위해 『금강경』에서는 일체 모든 존재는 하늘의 별, 눈병으로 생긴 허상, 바람 앞에 촛불, 마술사가 부리는 환술, 풀잎에 어린 아침이슬, 찰나적으로 기멸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의식적인 삶의 수레바퀴 속에 함몰되어 살아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렸을 적에는 꿈과 희망, 이상 속에 살았고, 나이가 들면서 커다란 문명의 이기와 메커니즘(mechanism)의 일부로 전락하는가 하면, 참된 자아를 망각한 채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인생의 진실을 상실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무력함과 고통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서 삐걱거리는 인생의 여정을 굴러간다. 이러한 삶의 현실을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진단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최초 녹야원에서 설법하신 인생의 실상인 사제법과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밝힌 인연생기법이다. 이를 통합해서 설명해 본다. 먼저 자각이 없는 고뇌의 현실은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이고, 고통
불교의 경전에 설해진 교설내용은 참으로 방대하다. 이러한 부처님의 설법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어느 경전이 우선한다는 개별적 판단을 유보시킨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 진리를 체득할 내용인 수행지침도 서로 연관되어져 있어서 어느 한 가지만을 고집한다면 숲 전체를 보지 못한 편협한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의 속성과 능력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의 전문수행자에게 설해진 수행의 요체는 자아에 대한 실상을 인지하여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온(蘊)·처(處)·계(界) 삼과(三科)를 현관(現觀)하여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을 체득하는 것이다. 이를 경험적으로 체험해 나아가는 것이 오정심관(五停心觀)과 사념처관(四念處觀)이고 최상의 지
부처 본원과 중생 원 만날때 구제기연 성립 부처님께서 이 세계에 출현하신 것은 지혜와 자비의 나타남이다. 그 목적은 중생을 제도함에 있는데, 중생이 성불하는 근거가 중생에 있으면서 중생에 있지 않은 연유는 여기에 있다. 너무나도 널리 잘 알려진 부처님 말씀 중에,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대, 소승의 여러 경전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부처됨의 본질이 진리”임을 시사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열반경』에서 말한, “여래의 법신은 상주하며 불멸이다”라는 의미가 생생하여진다. 왜냐하면 사법인(四法印)의 현실을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추구하여 영원한 행복의 상태를 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본질이 진리가 될 때에 그 대립은 없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는 신앙(信仰)이 필요하다. 신앙이란 스승이 될만한 분의 가르침을 믿고 우러러 받들어 실천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감에 스승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의지할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사실적이고 진실하며 진리에 부합한 것이어야만 한다. 만약 맹목적이거나 허구적이며 합리적이지 못하며 진리에 어긋난 것을 우리의 의식에 상정하여 믿는다면 위험천만한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믿음은 가장 진솔한 말과 진리에 상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검증으로 확인이 가능한 진실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검증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가정과 권위가 있는 선구자의 조언을 통하여 가능하다. 인류가 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서로 호응하면서 협력하지 않으면 잘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과 실천수행도 독자적일 수 없다. 즉, 우리의 신행을 돕는 우주적인 힘이 요청된다. 결국 우리의 수행은 우주적인 도움이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이 무상(無常)의 자아를 깨달아 무아(無我)를 실현하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우주적인 힘을 먼저 결집하여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실현하신 부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신앙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보다 앞서서 우주생명과 하나 되신 부처님의 지혜광명과 중생구제의 자비(慈悲)에 호응하는 염불수행을 통해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에 상응하는 것이다. 『불설아미타경』에서는 말한다. 극락세계와 그곳의 대중에 대한 설법을 들은 중생들은 거기에 태어나
본래로 모든 존재는 원래 텅 빔이기에 그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무자성(無自性)의 우주적인 존재임을 개현(開顯)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독자적인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연기의 진리이다. 나아가 존재의 모든 가능성 중에 그 근저에 부처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이는 바로 진여(眞如)의 발현이다. 이것이 석존께서 깨달으신 내용이고, 우리의 궁극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깨달을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인이나 어떠한 사물도 홀로 독존할 수 없고 여러 인연이 모여서 존재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단독자가 될 수 없고, 모든 관계 속에 법성진여가 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발견하여 자기화 하는 자가 부처요, 밝게 알지 못하고 무명의 부림을 받는 자가 중생이라고 한다
인간은 고통의 현실을 벗어나 행복한 삶을 지향해 가려는 꿈을 가지고 사는 존재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들의 환경을 설계한다. 인간이 지금 사는 이 사바세계는 참고 견디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세계이다. 설사 모든 고난을 겪으면서 무엇을 이룬다할지라도 완전한 행복의 조건을 이룰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인간은 청정하지 못한 몸을 가지고 무상한 현실 속에서 싫은 조건이라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원하고 즐거우며 참 나이고 청정한 환경을 바란다. 하지만 오탁(五濁)의 악세(惡世)로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불안한 요소가 늘 인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아주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 맞이하려고 준비해 둔 분이 계시다. 한 나라의 왕이자 법장비구이며 법장보살이었던
불교란 깨달음의 내용과 깨닫는 법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깨달음이란 텅 빈 마음, 집착 없는 마음, 머물지 않는 마음, 열린 마음의 실현이다. 이는 본래의 중생심(衆生心)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진여심(眞如心)·불성(佛性)을 발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텅 빈 마음의 스승을 찾아야 한다. 텅 빈 마음의 스승은 바로 우리에게 늘 항상 함께 할 수 있는 경전을 통한 부처님의 가르침과의 대면이다. 『아미타경』은 갖추어 말하면 『불설아미타경』이다. 불설(佛說)이란 부처님의 금구(金口)에서 나온 말씀이며 천대 만대에도 나올 수 없는 진귀한 가르침을 뜻하고, 아미타(阿彌陀, amita)란 한량없다는 뜻으로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의 참다운 덕을 모두 간직한 만겁에도 소멸하지 않는 존호를 의미하고, 경
원효는『대승기신론』에 열중하여 그에 대한 『기신론 소』2권, 『기신론 별기』1권, 『기신론 이장장』(이장의) 1권, 『대승기신론 종요』1권, 『대승기신론 요간』1권, 『대승기신론 대기』1권, 『대승기신론 사기』1권 등 7종의 연구서를 내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이론의 실천을 통해 당시 신라사회에서의 문제 상황을 해결하려 했다. 그는 과연 『기신론』의 어떤 점에 주목하여 그의 대중 불교화 운동의 이론서로서 『대승기신론』을 선택하였을까. 당시 신라사회의 불교계는 왕실이나 귀족 중심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출·재가 모두에 불성 있음 알아야 승려들은 성내(城內)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면서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는 거의 무관심하였다. 승려들은 자기네들만이 ‘진여’의 세계에 안주하면서 스스로를 ‘세속’에 머물
『대승기신론』에 대하여 무려 7종의 연구저서를 낼 정도로 이 논서에 심취했던 원효는 『기신론』의 성격을 다음의 세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첫째, 『기신론』은 인간의 마음이 원래 청정한 것임을 강조하는 중관학파와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현실적으로는 깨닫지 못하여 물든 상태에 있으며 이를 분석, 관찰하는 데 주력하는 유가학파, 이 두 학파의 주장을 지양·종합한 논서임을 주장한다. 원효, “기신론은 삼세·아라야식설” 실제로 『기신론』은 일심, 즉 중생심에는 마음의 자성청정을 밝히는 심진여문과 현실의 물든 마음을 긍정하고 이를 분석하여 종국에는 청정심을 얻을 수 있다는 심생멸문의 두 가지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일심이문의 구조는 『기신론』 전체의 대전제로 설정되어 있으며, 『기신론』이 중관·유가학파의 지양
지난번에 이어 관을 닦는 네 가지 방법 가운데 두 번째인 대비관(大悲觀)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② 대비관 : 일체의 중생이 무시의 때로부터 모두 무명의 훈습을 받는다. 이 훈습에 의해 마음이 생멸케 되어 이미 모든 심신의 큰 고통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고통도 한계가 없어서 버리고 여의기가 어렵건만 이를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 이처럼 매우 가련한 것임을 늘 생각해야 한다. ③ 서원관(誓願觀) : 이러한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 다음과 같이 대(大) 서원을 세워야 한다. 즉 원컨대 내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떠나게 함으로써 시방에 두루하여 일체의 모든 선한 공덕을 수행케 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 일체의 고뇌하는 중생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열반·제일의
지난 번 마음을 고르게 하는 것의 아홉 가지 심주 중 ⑤조순까지 밝혔다. 이어 ⑥적정(寂淨) : 갖가지 욕구하는 마음, 진에의 마음, 남을 해치는 마음 등 여러 나쁜 심사(尋思)와 탐욕개(貪慾蓋: 자기 뜻에 맞는 것을 탐내어 구하는 정신작용에 의해 우리의 심식을 덮어서 선법을 발생하지 못하게 함) 등의 수번뇌(隨煩惱)가 있어 마음을 요동케 하는데, 앞의 조순에 의해 그 허물을 더욱 깨달아 저러한 여러 가지 심사와 수번뇌들을 근심거리의 생각으로 여겨서 이러한 생각의 증상력에 의해 저러한 것들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다. ⑦최극적정(最極寂淨) : 위의 적정의 마음을 놓침으로 해서 여러 나쁜 심사와 여러 수번뇌들이 잠시 현행할 때에 곳에 따라 일어나지만 차마 받지 아니하고 이윽고 토해 내는 것이다. 이 중에
지난 번 지관문을 밝히면서, 지(止)를 닦을 때에는 첫째 고요한 곳에 머물러야 함을 말했다. 오늘은 이어서 두 번째의 이야기를 가지고 시작하기로 한다. 지(止)를 닦을 때에는 둘째, 단정히 앉아서 뜻을 바르게 해야 한다. 단정히 앉는 것은 몸을 고르게 하는 것이오, 뜻을 바르게 하는 것은 마음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먼저 몸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는 ① 앉는 곳을 편안케 하는 것이니 오래도록 방해가 없게 한다. ② 다리를 바르게 해야 한다. 만약 반가좌(半跏坐)할 경우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두어서 몸 가까이 끌어당겨 왼쪽 다리의 발가락이 오른쪽 넓적다리와 가지런하게 하며, 만약 전(全)가좌를 하려면 곧 위의 오른쪽 다리를 고쳐서 반드시 왼쪽 넓적다리 위에 두고 다음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넓
지난 번 분별발취도상에서 신성취발심으로부터 해행발심, 증발심 등은 부정취인 중에서도 수승한 이들이 차례로 닦아나가는 모습이었다. 이제 수행심신분에서는 부정취인 중 열등한 이를 위하여 네 가지 신심(信心)과 오문(五門)의 행을 닦을 것을 권장한다. 만약 이 열등한 이가 믿음을 닦아 네 가지 신심을 성취하면 다시 발취분중의 세 가지 발심에 의해 나아가게 됨은 물론이다. 먼저 네 가지 신심이란 첫째, 근본 즉 진여법을 믿는 것이다. 진여법이야말로 모든 부처의 귀의할 바이며 모든 행동의 근원이다. 둘째, 부처에게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고 믿어 항상 부처를 가까이 하고 공양, 공경하여 선근을 일으켜 일체지를 구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어서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할 것을 생각한다
지금까지 정의를 밝혀 드러내고(顯示正義), 삿된 집착을 다스리는(對治邪執) 부분을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모든 부처님들이 증득한 도를 향해 모든 보살이 발심해서 수행해 나아가는 뜻을 밝혀보겠다. 도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모양을 분별하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에서 도에 발심하는 모습에 또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은 십신의 자리 중에서 신심을 닦아 익혀서 신심이 성취되어 결정심을 일으켜 십주(十住)에 들어가는 것이다. 둘째 해행발심(解行發心)은 십행(十行)의 자리 중에서 법공을 잘 알고 법계를 수순하여 육도행을 닦아서, 이 육도행이 순결해지고 성숙되어 회향심(廻向心)을 일으켜 십회향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셋째 증발심(證發心)은 초지 이상으로부터 십지까지의 자리에서 법신을 증득하
지금까지 해석분 가운데 바른 뜻을 밝히는 부분(顯示正義)에서 먼저 뜻을 풀이하였다. 이제는 생멸문으로부터 바로 진여문에 들어가는 부분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우리 인간의 구성 요소인 오음(五陰)은 크게 색과 심으로 나뉜다. 색음을 추구한다면 모든 색을 부러뜨려서 극미에까지 이른다 해도 그 실체를 영구히 얻을 수가 없다. 육진경계라는 것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서는 생각할 만한 모양이 없는 것이다. 또한 수·상·행·식음의 심(心)도 형상이 없어서 시방(十方)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다. 중생은 무명으로 혼미하기 때문에 마음을 망념이라 하지만 마음은 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동념(動念: 즉 망념)을 추구해 본다면 이미 없어졌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오, 중간에 머무는 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