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소다라는 머리카락을 풀고 장신구를 뗐다. 딱딱한 바닥에 누워 잤으며 다듬지 않은 음식을 한 끼씩만 받았다. 수행자처럼 살겠다고 공표한 대로 입고 먹었다. 그간 태생에 기대고, 미모에 기대고, 칭찬에 기대고, 허영심에 기대 살았다. 어느 하나가 사라지면 내가 넘어진다는 것, 싯다르타의 출가가 일깨워 준 진실이었다. 기댈 것을 허물면 어떤 삶이 될지 알고 싶었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남의 운명에 내 운명을 맡기는 일만은 없겠지 싶었다.6년이 지난 어느 날, 싯다르타와 관련한 소식을 들었다. 깨달았고 교단을 이뤄 가르침을 펼친다는 이야기
싯다르타는 남편이되 남편이 아니었다. 겉모습은 나무랄 게 없었다. 싯다르타는 온화한 말과 부드러운 몸짓으로 대해 주었다. 그러나 야소다라는 그 말과 행동에서 마음을 느끼지 못했다. 눈을 마주쳐도 시선을 받는다는 느낌이 없었으며, 서로 안고 있어도 안겨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설령 영원히 걷는데도 닿지 못할 아득한 곳에 싯다르타가 서 있는 듯했다. 싯다르타의 눈망울을 볼 때마다, 혹시 자신이 비치지 않을까 기대하는 일도 어느 순간부터 포기하고 말았다.10년이 흐르는 동안 야소다라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지냈다. 물론, 이야기를 나
싯다르타에게 구애하고자 연회장을 찾은 처녀는 무려 500명. 각기 얼굴에 바른 호화로운 화장과 몸에 붙인 갖가지 보석은 연회장을 빛의 바다로 만들었다. 500개의 빛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도 싯다르타는 더욱 눈부셨다. 일찍이 누구도 본 적 없을 완벽한 외모에 불타오르는 듯한 눈의 광채는 분위기를 여지없이 압도하며 모든 시선을 집중시켰다. 여성들은 싯다르타에 홀린 채 줄지어 앞으로 갔고, 싯다르타는 한 명, 한 명에게 보석이 든 바구니와 인사를 건넸다. 신붓감을 고르기 위해서였다.코앞에서
슬쩍 눈을 뜨자 방 안은 이미 평온한 빛에 잠겨 있다. 어김없이 떠오른 태양이 사방의 모든 것을 깊은 잠에서 깨우고 있었다. 야소다라는 부드럽게 하품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도시는 벌써부터 아침을 맞이하느라 분주하다. 팔아야 할 물건이 가득 담긴 보따리를 들고 시장으로 향하는 사람, 집 앞에 나뒹구는 잡다한 것을 비질하는 사람, 잠이 깨지 못했는지 눈을 간신히 뜬 채 엄마 손을 잡고 종종거리는 아이. 제 일에 골똘한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면서 낯선 새벽 풍경은 낯익은 도시의 광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야소다라는 하루에서
축 늘어진 아이의 시체를 안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고타미는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죽은지도 모르고 아픈 아이를 살려 달라며 울부짖는 모습을 안쓰럽게 여겨 물과 음식을 건네주는 이도 있었지만 대개 손가락질하거나 흉내 내며 비웃곤 했다. 더욱 수척해져 뼈만 앙상하게 남은 데다 말과 행동마저 영락없이 실성한 사람의 그것과 똑같아 우스꽝스러운 행색이었기 때문이다.어느 날, 그런 고타미에게 누군가 다가와 물을 주며 말했다. “당신의 아이는 죽었습니다. 모르겠습니까?” 고타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 아이는 많이 아프긴
아들을 낳은 이후 고타미의 삶은 달라졌다. 자신을 대하는 남편 가족의 행동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볼품없는 외모에 한 푼의 지참금도 가져오지 않은 천덕꾸러기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대를 이을 아이를 낳은, 그 아이를 길러야 하는 엄마로 존중받았다.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해코지했던 날들과 비교하면 같은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고타미는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그저 스치고 지나는 바람과 같다고 믿었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하루
낮은 신분에 옹색하기까지 한 집안에서 태어난 고타미는 먹는 것마저 시원찮아 살가죽이 쪼그라져 붙을 만큼 야윈 채로 성장했다. 생기를 찾아보기 힘든 볼품없는 외모의 그를 두고 사람들은 빼빼 말랐다는 의미의 ‘키사’라는 별명을 붙였다.“저기 키사고타미가 간다! 유령 같은 키사고타미가 간다!”집을 나서면 아이들이 둘러싸 이런저런 욕을 쏟아 붓곤 했지만 고타미는 어떠한 대거리도 하지 않았다. 맞받을 힘도 없었거니와 그렇게 할 만큼의 분노를 느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비천한 신분, 궁색한 살림살이, 초라한 외모는 도리어 깊이 사색하는 습관을
사마와티를 해하기 위해 마간디야가 처음에 한 일이란 단순히 무고에 불과했다. 사마와티가 양부와 일을 꾸며 왕을 내쫓으려 한다거나 수행자들과 방탕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을 냈던 것이다. 하지만 왕도, 사람들도 소문을 믿지 않았다. 무고가 통하지 않자 왕의 침실에 독사를 풀어놓고는 사마와티가 왕을 죽이기 위해 악독한 짓을 했다고 모함했다. 이때만큼은 그 말을 믿은 왕이 분노하여 사마와티를 불러 추궁한 뒤 화살을 쏘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화살이 사마와티의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 꽃으로 변한 것이었다. 왕은 그제야 죄 없는
왕의 아내가 된 사마와티의 삶은 이전처럼 단조롭게 흘러갔다. 깊은 생각에 잠겨 정원을 산책하거나 하녀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양부인 고사카가 쫓겨나지 않고 재상의 자리를 지켰다는 점에 안도했을 뿐, 왕비가 되었다는 사실은 사마와티에게 어떠한 기쁨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후궁 마간디야의 탐욕스러운 눈빛을 마주하는 일이 잦게 되자 원인 모를 불안감에 몸을 떨곤 했다. 자신을 향해 칼이라도 들고 달려들 듯한 마간디야를 보는 일은 항상 곤욕스러웠다.그러던 어느 날,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하녀가 흥분에 겨운
“네가 생각해낸 것이냐?”재상 고사카는 질문을 던지며 사마와티의 얼굴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이제 막 소녀의 티를 벗은 청초한 표정이었지만 눈에는 짙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예 어르신. 사람들이 싸우는 게 안타까워 그랬습니다.”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급식소의 소란을 정리한 기발한 생각이 이 어린 아이의 머리에서 나온 게 맞다니, 고사카는 돌아서려는 사마와티에게 다시 한 번 말을 걸었다.“혼자 나온 듯한데, 부모는 어디에 있느냐.”“갑자기 병이 들어 며칠 낮밤을 앓으시다가 어젯밤에 두 분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고사카는 사마와티의
마을에 역병이 돌았다. 피부에 반점이 올라오는 것을 시작으로 호흡이 점점 거칠어져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가 되면, 이내 피를 토하며 목숨을 잃는 무서운 병이었다. 수십 구의 시신이 매일같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지옥처럼 변한 마을에 남게 될 경우 결과는 뻔했다. 수많은 사람이 병을 피해 이웃 마을로 도망쳤고, 사마와티의 가족 역시 집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16세에 불과하던 사마와티는 시체들이 널브러진 섬뜩한 거리 풍경이 무서워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마을을 빠져나와야 했다.이웃 마을엔 재상 고사카가 왕의 명령을 받아 만든 격
“선한 행위든 악한 행위든 과보가 따릅니다. 세 번의 결혼 생활이 고통스럽게 마무리된 것은 모두 제 과보 때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일곱 번째 전의 생애부터 시작됩니다.”일곱 번째 전의 생애에서 이시다시는 도시에서 유일한 금속 세공 장인이었다. 남다른 손재주로 빼어난 솜씨를 인정받은 데다가 지역에선 그만한 기술을 지닌 이가 없어 일거리는 늘 넘쳐났다. 웬만한 거부 못지않은 부를 쌓은 이시다시는 그것을 쾌락을 즐기는 데 쏟아부었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밤마다 거리로 나가 질펀하게 먹고 마셨으며 돈을 주고 여성과 어울렸다.
이시다시의 온몸은 핏기가 가신 듯 허옇게 변했다. 창백한 얼굴 위로 가냘픈 눈물 자국이 길게 늘어졌다. 부모의 전갈을 읽었던 순간, 자신을 괴롭혀 왔던 수치스러움과 분노는 모두 사라졌다. 대신에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흩어져 붙잡을 게 없다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세 번의 결혼 생활 동안 단 하나라도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것을 탓하며 그럭저럭 버틸 순 있겠는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잘못은 없었다. 이시다시는 이토록 모진 생을 스스로 마감해야겠다고 결심했다.하지만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두 번째 남편은 자신을 피할 뿐 아니라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대놓고 욕을 쏟아냈다. “형편없는 여편네 같으니라고. 짜증나는 당신의 그 얼굴을 내 앞에서 당장 치워! 꼴도 보기 싫으니까!” 첫 번째 남편도 자신을 피해 다녔지만, 그나마 험한 말을 뱉진 않았다. 이시다시는 지금의 남편이 욕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폭력을 휘두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두려웠다. 답답한 것은 이번에도 남편이 자신을 미워하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두려움에 떨다가도 용기를 내어 이유를 물어보면 남편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평소
이시다시의 부모는 근방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지만 인색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함부로 화를 내지 않았으며 사람을 위아래로 구분하지 않고 진솔하게 대했다. 빈궁한 이에게 가진 것을 나누는 일이 잦았는데, 도움을 요청받으면 언제든 음식과 재물을 광주리에 듬뿍 퍼담아 건네곤 했다. 계급 혹은 빈부 간의 경계가 송곳처럼 날카롭던 시절,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여져 나라 전체로 명성이 퍼져나갔다.이시다시는 부모의 성품을 흡수하며 성장했다. 하인을 아랫사람으로 인식하는 대신에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바라볼 줄 알았으며 재물은 움
그날 이후 푼니카는 기회 될 때마다 기원정사로 가서 붓다의 설법을 들었다. 하녀의 신분이어서 기원정사를 매일 방문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심을 더욱 북돋게 했다. 악업을 녹이고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간절함의 크기만큼 깊고 고요한 선정에 잠겨 붓다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마음에 새겼다. 열심히 정진한 결과, 푼니카는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냈다. 스스로를 옭아맸던 세 가지 번뇌를 내려놓았고 더 이상 악업에 물들지도 않았다. 미소 머금은 얼굴과 부드러운 말투, 배려 어린 행동은 누구보다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험상궂은 표정으
아버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머니에 대해선 확실히 아는 게 있었다. 자신처럼 하녀였다는 사실이다. 수닷타 장자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 푼니카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다. 일을 야무지게 하는데다가 성격도 무던해 많은 이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푼니카가 걸음마를 떼기 전에 병마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기에 어머니에 관한 기억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푼니카를 안쓰럽게 여긴 주변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주곤 했어도 부모가 없다는 사실은 늘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옛 기억을 꺼낼 때마
붓다에게 귀의한 시리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설법을 듣고 수행했다. 어느 날부터는 욕망에 젖어 흥청망청했던 지난날도, 추악한 악행을 저질렀던 순간도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붓다의 법을 알게 해 준 소중한 인연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난생 처음 찾아온 평화에 한없는 행복을 느끼며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한 가지 서원을 세웠다. 죽는 날까지 매일 8명의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겠다는 서원이었다. 시리마는 유녀로 생활하며 모은 막대한 재산을 공양을 준비하는 데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산과 바다에서 나는 진귀한 음식
뜨거운 기름을 웃타라의 얼굴에 쏟아부은 시리마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이게 바로 네 죗값이다! 얼굴이 형편없이 망가졌으니 남편은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야! 하하!”하지만 웃타라에게선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고, 오직 자신의 웃음소리만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시리마는 웃음을 멈추고 웃타라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방금 전까지 펄펄 끓고 있던 기름이 차갑게 식어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웃타라는 자신을 향해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형용하기 힘든 공포가 밀려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시리
낮은 시리마에게 항상 지루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한가로이 잠을 자거나 뜰을 산책해 보아도 지루함은 도무지 달래기 어려웠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과 활기찬 거리의 분위기 역시 따분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길고 긴 낮의 따분함은 어스름이 내릴 즈음부터 햇살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한다. 하늘을 물들인 노을처럼 빨갛게 화장을 하고, 취객의 술주정처럼 요란하게 몸을 치장하고 나면 시리마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떠오른다. 그녀는 왕사성에서 제일가는 유녀. 온갖 금은보화를 손에 쥐고 자신을 찾는 남자들을 바라볼 때마다 시리마는 짜릿한 쾌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