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침저녁 기도를 올리고, 생활 속에서 금강경을 독송하며 부처님의 가피에 감사함을 전하는 이가 있다. 무진 이종태 포교사(83)다. 30년 넘게 수행과 신행을 이어오며 불심을 주변과 나눠온 그는 “부처님과의 인연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담담히 말했다.이종태 포교사가 본격적으로 부처님께 귀의한 건 30년 전이다. 1942년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절에 드나들었지만, 학업과 분주한 일상 속에서 마음을 돌볼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불심이 깊어질 기회 또한 오래도록 찾아오지 않았다.“어릴 때
차디찬 쇠창살과 곳곳에 설치된 CCTV, 사회와 단절된 공기가 감도는 공간 교도소. 온기라곤 전혀 없을 것 같은 이곳에 30여 년간 불법(佛法)을 전하며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은 사람이 있다. 지난 7월 전국교정인불자연합회의 새 수장으로 취임한 전영광(평담) 회장이다.원래 전 회장은 교도관이라는 직업에 무관심했다. 그러나 무슨 인연 때문이었을까. 우연히 교정직 공무원 특채 공고에 지원했는데, 합격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었다. 그렇게 그는 1993년 9월부터 교도관의 길을 걷게 됐다.좋든 싫든 수용자를 상대해야 하는 전 회장은 상담 업무를
인도 북부 쉬라바스티.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물며 법을 설한 기원정사가 자리한 성지다. 조계종 소의경전인 ‘금강경’의 배경지이기도 한 이곳에 1999년 머나먼 한국에서 온 작은 초가집 하나가 ‘천축선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 천축선원은 한 번에 250명의 순례객을 맞이할 수 있는 대가람으로 성장했다. 띠풀집에서 출발한 도량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뒤에는 불사 초기부터 지금까지 보시와 봉사, 행정, 설계·건설, 운영 등을 도맡은 한경선(적조행·75) 총무보살의 원력과 헌신이 있었다.한경선 불자는
“관음사는 처음이신가요? 저희가 안내해 드릴까요?”제주 관음사 주차장 한편, ‘사찰 역사·문화 안내센터’가 자리한 작은 컨테이너 안에는 불교를 공부하는 젊은 대학생들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어린이부터 외국인까지, 누구든 사찰을 찾으면 한달음에 달려가 반갑게 맞이하는 이들은 바로 ‘제주불교 대학생 사찰문화해설사’들이다. 이들의 활기찬 활동은 왜곡된 사찰 해설을 바로잡고, 나아가 불교 인구 감소라는 시대적 난제에 맞서는 새로운 전법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이 특별한 포교 활동은 김보성(구담·58) 대한사찰문화해설사회 대표이사의 원력에
“포교에서는 시각적인 요소가 중요합니다. 사진은 사찰과 불교 문화유산의 매력과 분위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관적으로 전하죠. 사람들이 이 같은 요소를 눈으로 접하면 불교에 관심을 갖고 다가올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런 점에서 사진도 하나의 포교 방편입니다.”불교계에서 영상 콘텐츠 기반의 포교가 대세라지만, 전국의 산사를 20여 년간 발로 누비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온 최우성 불교사진작가(효천,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사진으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 동안 사진을 통해 불교를 알려온 그
불자의 역량 결집을 고민하는 한 남자가 있다. 춘천 봉덕사에서 만난 정수동(63·불이) 거사는 가는 곳마다 불자 조직을 만들며 신행의 터전을 닦아왔다. 대학생 시절엔 학교에 불교동아리를 만들었고, 같은 학교의 교직원이 된 후에는 사라졌던 동아리를 다시 세웠다. 춘천지역 사찰의 신도들을 하나로 묶어 연합 조직을 구성했고, 지금은 순례단을 이끌며 도반들의 신행을 돕고 있다. 그 모든 실천의 바탕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다져온 깊은 불심이 있었다.어렸을 적 정수동 거사는 새벽 5시에 불 꺼진 방 안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정근 소리에 잠에서
“저에게 종교 활동은 어릴 적 간식 준다는 말에 친구를 따라 교회를 가본 게 전부였어요. 종교엔 관심도, 인연도 없었습니다. 그저 먹고사는 일에 정신이 없었죠. 그런데 지금은 경전도 외우고 법당에서 삼배도 합니다. 이게 다 연등이 맺어준 인연 덕분입니다.”누구에게나 삶을 바꾸는 ‘순간’이 있다. 토목 건설업에 몸담으며 누구보다 현실적인 삶을 살아왔던 오명권(67·강운) 제천불교사암연합회 사무총장에게 그 순간은 뜻밖에도 ‘못 받은 공사비’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불교라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신심을 다지고
4월 4일, 봄바람에 살랑살랑 꽃잎이 날리는 서울 내원사.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자원봉사단 화목회 소속 자원봉사자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었다. 이날은 정기 사찰 봉사일. 공양 준비와 환경 정리, 법당 청소까지 하루종일 바지런을 떨어야 하는 날이다. 이날 누구보다 먼저 도착해 벌써 부지런히 몸과 손을 움직이며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었다. 자원봉사단 화목회의 팀장이자, 30년 넘게 봉사의 길을 걸어온 이문희 보살(법명 금강심)이다.이문희 보살은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자원봉사단이 창립된 1995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화목회에서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쌈마 삼붓따사(그분 세존, 공양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오늘은 코살라 상윳따(Kosalā Saṃyutta)를 강독할 차례입니다. 코살라국은 당시 고대 인도에서 마가다국과 함께 강력한 왕국을 형성했습니다. …”3월 9일 서울 종로의 한 오피스텔에서 한 명의 스님과 3명의 대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이필원 동국대 와이즈캠퍼스 교수가 진행하는 경전 강독회가 열렸다. 강독회 시작 전, 참석자들은 오피스텔에 마련된 불단을 향해 삼배를 올리고, 삼귀의와 ‘자애경’을 외우며 마음을 가다듬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수능을 마치고 의성 고운사로 향했다. 스님들이 손수 만들어준 피자를 먹고 오후에는 꽁꽁 언 강을 가르며 스케이트를 탔다. 겨울방학을 맞아 동갑이었던 비구니 스님의 친구들이 찾아온 덕에 사찰은 늘 떠들썩했다. 아래에 위치한 학교에서 축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스님이 모는 경운기 뒤에 올라타 일몰에 황금빛으로 물든 산사를 바라봤다. 애초 보름만 머물 계획이었지만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열아홉 살과 스무 살 사이, 이제 막 성인으로 발돋움하려는 청년에게 고운사에서의 한 달은 평생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이길수(
1988년, 대전 용두동은 한국전쟁의 잔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땅이었다. 피난민들이 모여 만든 피난촌, 주소지도 없는 판잣집들이 언덕을 뒤덮었다. 삶의 터전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마지막 피난처처럼 보이는 마을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마을엔 전쟁의 상흔이 남긴 환자들과 노인 인구가 많았다. 피난민이 사는 곳이니 변변한 병원이 있을 리 만무했다. 병원이 있다고 해도 하루 사는 것도 팍팍한 살림에 병원비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아파도 치료를 거부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이런 마을에 갓 대학을 졸업한
“어데예, 뭐시 부끄럽다 캅니꺼. 이게 미스코리아 어깨띠보다 더 멋진 거라예. 빤듯하게 둘러 보이소. 집에서 가져오신 젓가락과 봉지도 하나씩 단디 챙기셨지예?”무더위가 잦아들 기운이 보이지 않던 9월 중순, 주말이면 인파로 북적이는 부산시민공원도 평일 오후에는 잠시 쉬어가듯 한적한 가운데 어디선가 산사의 풍경소리 같은 청아한 웃음소리가 쟁쟁히 울렸다. 소리를 따라 도착한 곳은 공원의 상징물 가운데 한 곳인 대형 분수대 앞. 마침 큰 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에 모인 중년 여성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웃음꽃이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주
무더운 여름,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권진영 교법사(56·도안)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선연 4기 학생들을 위한 캠핑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선연은 불교 미래 인재 양성을 목표로 불교학과 진학과 출가를 꿈꾸는 학생들로 구성된 모임이었다. 이번 캠프를 통해 학생들이 자연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체득하길 바랐다. 직접 텐트를 치고, 장작에 불을 지피며, 음식을 준비하는 열정은 그야말로 전법의 일환이었다.그날 밤, 학생들에게 잠자리를 내어주고 자신은 승합차에서 잠을 청했다. 낮 동안의 피로가 밀려와 몸은 무거웠지만, 학생들
오전 6시. 정적이 흐르던 정각선원 문이 열린다. 불이 켜지고 밤새 머물던 어둠도 물러난다. 법당에 들어선 천우정(51·혜관) 국회직원불자회장은 정성껏 합장 반배한 후 부처님 전으로 발길을 옮긴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지극한 마음으로 삼배를 올린다.‘국민과 국가를 위한 좋은 정책 아이디어가 떠오르길 발원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국회 공무원 30년 차인 천 회장에게 매일 아침 정각선원에서의 기도는 오래된 일상이다. 그가 불자의 길로 들어선 것은 중학생 시절 한 생각에서 비롯됐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는 중학교 3학년이 되
2023년 11월 28일, 네팔 룸비니 동산에서 ‘한국의 종 타종 및 종각 낙성식’이 진행됐다. 도안사 주지 및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주 선묵혜자 스님을 비롯해 네팔 정관계 인사, 한국 불자 160여명이 함께했다. 이들은 새로 조성한 범종을 타종하기 위해 종각에 올랐고, 세계 평화를 염원하며 힘차게 당목을 당겼다. 이윽고 대지를 깨우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그 자리에 함께한 모든이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안겼다. 타종식이 마무리된 후 남몰래 눈가를 훔치던 이가 있었다. 종 불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홍현숙
왜 해인사였을까. 아직도 알 수 없다. 연차를 냈다. 생애 첫 평일에 낸 휴가였다. 2005년 아내와 경남 합천으로 향했다. 이유는 없었다. 가본 적도 없었다. 마음이 끌렸다. 차를 타고 무작정 출발했다. 해인사에 도착해 대적광전에서 108배를 했다. 절하는 법도 몰랐다. 곁눈질하며 따라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60배가 넘어가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비오듯 땀이 쏟아졌다. 얼굴에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땀인지, 눈물인지도 모를. 108배를 마칠 때쯤 엉엉 울음이 터졌다.이승현 서울 조계사 신도회장(65·인팩코리아 대표이사)은 “창피하
“영동군 불심을 결집할 공간을 만들어야겠다.” 영동군 불자들의 소통공간이자 봉사와 교육의 거점이 될 ‘불교회관을 건립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뜻을 함께하는 30여 명의 도반들과 영동 호국관음사에서 금요기도를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황룡사 주지 종림 스님과 함께 ‘영동생활불교실천대학’을 개설했다. 간절한 기도는 10년간 이어졌고 지난해 7월, ‘영동군불교신도연합회관’이 건립됐다. 지역 불교발전, 포교, 봉사에 진력하고 있는 정영옥(65·도안신) 영동군불교신도연합회장이 처음부터 신심깊은 불자였던 것은 아니다.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대전
1962년 햇살이 따갑던 어느 여름날의 종로 대각사. 당시 대학생으로 절 일을 돕던 이찬우(82·백암) 작곡가는 밀려드는 졸음에 잠시 쉴 곳을 찾았다. 때마침 법회가 끝나 사람들이 빠져나간 텅 빈 법당에 들어갔다. 이곳저곳 둘러보는데 문득 불단 아래 미닫이문이 보였다. 저 안에서 잠깐 눈을 붙여야겠다 생각하고 비좁은 공간에 파고들어 가만히 몸을 누였다. 불경스럽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나 시원하고 아늑한 느낌이 먼저 와닿았다. 호기심에 주변을 둘러보다 머리맡에 쌓인 책 중 한 권을 골라 펼쳤다. 춘원 이광수의 ‘청법가’가 눈에 들어
‘원효 스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예상치 못한 동생의 죽음은 김선아 감독을 불안정하고 위태롭게 만들었다. 숨을 쉬고 있는 것, 삶 자체에 의미를 찾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그런 그에게 한 권의 책이 전달됐다. ‘길에서 원효를 만나다’. 책을 받아든 알 수 없는 강한 이끌림을 느꼈고, 자리에서 단숨에 책을 읽어나갔다. ‘일체유심조’. 그동안 찾아 헤매던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았다. 원효 스님이 궁금해졌다. ‘해골물’ ‘요석공주와 설총’ 등으로만 알려진 원효 스님은 과연 누구일까.관련 논문을 찾아 읽고 또 읽고, 원효 연구로
“복순아, 너 나랑 살면서 소리 배워라”19세였다. 주민등록증을 막 받아든 때였고, 그저 판소리가 좋아 무작정 공연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연습하던 참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물론 소리꾼을 꿈꾸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처음 본 선생님의 도제가 되는 건 망설여졌다. 그러자 선생님은 “나 아무한테나 이런 말 안 한다. 대학 가야지. 내가 판소리 알려주마”하며 강한 말투로 권했다. 소리에 대한 열망이 컸던 소녀는 결국 선생님을 따라나섰다.동초제 판소리 전수자 차복순(담화련·49) 명창이 재능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순간이다. 이름난 소리꾼인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