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월 18일(전년도 음력 12월 8일 성도재일), 장성 백양사에서 결성된 고불총림(古佛叢林)은 해방 후 난맥에 빠진 한국불교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는 원대한 결사였다. 전환기 한복판에서 수행과 계율 중심의 청정 승가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선언이었고, 일제강점기 내내 제도적 틀에 갇혀 있던 한국불교가 스스로 힘으로 정법의 근본을 회복하겠다는 강건한 의지였다.“오직 부처님의 크고 위대한 위엄과 공덕의 빛과 이 땅의 모든 덕망 높고 훌륭한 옛 스승들의 남긴 지혜와 교훈을 이어받아, 하나의 등불이 무수히 많은 등불을 밝혀 오래
해방 후에도 사찰령의 그림자와 일본불교의 영향이 교단을 지배했고, 자성의 목소리는 미약했다. 만암 스님은 이 현실을 “왜구가 물러간 후 강토를 회복해 건국의 기운이 농후하여 가는 중에 불교는 아직도 미혹의 구름에 가려 서광을 보지 못한다”고 개탄했다. 일제강점기 선학원의 설립과 용성 스님이 승려 결혼·육식 반대 건백서를 제출한 것 등 전통불교를 지키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방 후 정화의 필요성을 처음 공론화한 것은 만암 스님이었다. 식민지의 폐해를 딛고 한국불교의 오랜 전통과 정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19
해방은 불교계에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민족정기를 되살릴 인재 양성의 도량’을 세워야 한다는 공감대가 전국적으로 형성됐다. 종립 중등학교 설립이 연이어 추진됐고, 정광학원의 설립은 전남 지역 불교계에서 일어난 응답이었다.해방 직후 백양사에서 진행된 ‘한글강습회’는 만암 스님의 교육 의지가 일관됨을 보여준다. 스님을 도와 강습회를 주도했던 제자들은 다른 지역의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최태종과 신지정 등 젊은 스님들은 직접 목포로 가서 일본 정토진종 대곡파가 1898년 설립한 동본원사 목포별원을 확보했다.목포별원은 광복 후 목
1945년 8월 해방의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9월 2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가 발표되며 한반도는 북위 38선을 경계로 행정 관할이 갈렸고, 교육과 행정의 공백이 이어졌다. 거리와 관청에는 미군정의 새 표기와 일제 잔재가 겹친 채 혼란이 깊어졌다. 그럴수록 우리 말과 글의 회복, 곧 언어 주권 복구는 당면 과제로 떠올랐다.만암 스님은 교육이 민족 재건의 뿌리라 보았다. 스님은 그 결심을 곧 행동으로 옮겨 조선어학회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11월, 상좌 석호(서옹) 스님을 서울 청진동의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 사무실로
근대 조선의 도시에선 서구식 생활양식과 기독교식 의례가 빠르게 확산됐다. 1900년대 전후로 교회당에서의 결혼식이 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는 도시 지역 결혼식의 상당 부분이 기독교식으로 치러졌다. 웨딩드레스와 찬송가, 목사의 주례는 근대성과 문명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전통식 혼례 대신 서구식 의례가 새로운 표준이 되면서, 통과의례의 무대에서 불교의 존재감은 더욱 옅어졌다. 젊은 세대가 맞이하는 삶의 전환점에서 불교가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불교는 대중과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불교가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에서 만암 스님은
만암 스님에게 제주는 변방의 섬이 아니었다. 포교소라는 거점들을 연결해 섬 전체를 하나의 그물로 엮는 일, 그것이 곧 제주불교의 재건이었다.일제강점기 제주에는 본산으로 지정된 사찰이 없었다. 여러 본산이 제각각 포교소를 두는 이례적 구도가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백양사는 1924년부터 포교소를 세워 제주불교 중흥의 물꼬를 트고, 나중에는 섬 전역을 연결하는 촘촉한 네트워크를 만들었다.제주불교는 조선 중기 제주목사 이형상의 극악한 훼불 조치로 사찰과 불상이 무참히 파괴됐다. 유구한 불교 역사가 절멸된 ‘무불(無佛)’의 시대가 200여
제강점기 한국불교는 온갖 통제를 받으면서도 새로운 포교의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만암 스님이 이끌던 백양사는 31본산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포교 활동을 전개한 사찰로, 60여 곳의 포교소를 운영했다. 상대적으로 재정이 넉넉했던 통도사, 범어사, 해인사 등보다 앞선 수치다. 사찰령과 본산제도가 시행되면서 불교계는 각 본산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운영됐다. 특히 포교 활동은 근대 불교 발전의 핵심 지표로 부각됐다. 전통적으로 산중불교의 성격이 강했던 한국불교가 도시와 지역사회로 기반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포교소 설치는 가장 중요한 과업 가
1930년대 일제강점기, 불교계는 끊임없는 혼란과 위기 속에 놓여 있었다. 종단 내부의 결속력 약화와 재정난은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위축시켰고, 미래를 책임질 인재 양성마저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 교육기관의 운명을 둘러싼 갈등이 정점으로 치달았다. 보성고등보통학교(이하 보성고보) 인계 사태다.이 사건의 최전선에는 “학교 인계는 불교계의 수치”라 외치며 끝까지 교육의 가치를 수호하려 했던 뚝심 있는 인물이 있었다. 백양사 주지 만암 스님이다. 스님이 전개한 보성고보 인계 반대운동은 단순한 경영권 문제를 넘어 불교계의
근대기 불교계의 가장 큰 숙원 사업의 하나는 고등전문교육기관 설립이었다. 경전·주석 위주의 전통 교육에서 벗어나 불교 교리를 새롭게 해석하고 객관적으로 연구할 전문 인력이 절실했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할 인재를 양성하는 해법도 전문교육기관에 있었다.1906년 불교연구회가 설립한 명진학교는 최초의 근대적 불교학교였다. 비록 학교 이름과 학제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만해 스님을 비롯해 불교근대화를 견인한 인물들을 배출했고, 불교사범학교·불교고등강숙·불교중앙학림으로 이어졌다. 특히 중앙학림은 3·1운동 당시 학생들
만암 스님은 백양사 주지를 맡는 동안에도 한 사찰에 국한된 지도자만은 아니었다. 스님의 관심은 백양사를 넘어 한국 불교계 전반에 걸쳐 있었다. 불교를 비롯한 각계 지도자들과 교류하고 변화를 주도하며, 불교계를 조직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신념을 일관되게 실천했다.만암 스님이 대외 활동을 본격화한 1910~20년대는 한국 사회가 격심한 변화를 겪고 있었으며 일제의 지배력은 점점 강화됐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의 위상도 아직 정립되지 않은 시기여서, 각 종교마다 새로운 신자 확보를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었다.1927년 3월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만암 스님이 추진한 중창불사는 대성공이었다. 백양사는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찰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퇴락했던 사찰이 불과 10여 년 만에 대가람의 위용을 되찾은 데에 놀라워했다. 계율이 엄격하고 수행 가풍이 살아있는 청정한 도량이라는 평판까지 얻기 시작했다. 백양사는 더 이상 궁벽한 사찰이 아니었다.백양사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변화된 모습을 직접 살펴보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상현(尙玄)·무능거사(無能居士) 등 호를 썼던 이능화(李能和, 1869∼1943)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중국어·일어·영어·불어 등 외국
백양사는 살림이 넉넉지 않았다. 연간 40여 석에 불과한 양곡 수입으로 사찰 대중이 1년을 지내고 선원과 강원을 운영해야 했다. 낡은 전각을 수리하기도 버거웠기에 새로운 불사는 엄두조차 못 냈다. 만암 스님이 백양사 재건의 뜻을 세우고 대중이 이를 적극적으로 돕더라도 새로운 재정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면 사실상 중창불사는 불가능했다.만암 스님이 활로를 찾은 것은 노동을 중시하는 선의 오랜 전통에서였다. 인도불교에서 출가자는 무소유를 지향했다. 수행자는 노동을 일체 않고 탁발로 생활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렸고, 수행
만암 스님이 출가했을 때 백양사에는 낡은 극락보전과 요사채 등 허름한 건물 몇 동이 전부였다. 백양사는 개산 이후 성쇠를 거듭했지만 이렇게까지 쇠락한 적은 없었다. 조선전기 억불정책에도 미타전·대장전·동협장당·승당·종루전·식당 등 20여 동의 전각이 있을 정도의 사세(寺勢)를 이어왔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 잡역과 공물, 지방 양반들의 수탈이 잇따르면서 더는 견뎌내기 어려웠다. 전각을 보수할 여력도 인력도 없었다. 절은 빠르게 피폐해졌다. 철종 11년(1860) 관부(官府)에서 백양사 승역(僧役)을 감면하고 침탈을 금지함에 따라 조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과 백파긍선(1767~1852) 스님은 선 수행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견해는 달리했으나 추사도, 백파 스님도 서로의 깊은 안목을 인정했다. 백파 스님이 입적하자, 추사는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라는 비문을 남겼다. 금석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이 비문은 만년의 추사가 백파 스님을 화엄종주와 대율사로 찬탄하는 내용이다. 백양사에는 추사가 직접 백파 스님에게 써주었다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글이 전해온다. ‘만암(曼庵)’이라는 사언절구의 한시다.
조선이 개항하자 일본불교 종파들은 조선에 포교사들을 파견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제 국가를 선포한 일본 정부는 신도(神道)를 국가이념으로 치켜세웠다. 반면 불교에 대해서는 불상을 파괴하고 절을 없애는 강력한 폐불훼석(廢佛毁釋)을 단행했다. 위기에 직면한 일본 불교계는 정권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 하나가 조선에서의 포교로 일본에 대한 호감을 높이고 식민지 추진 정책에 대한 반발을 줄이는 것이었다.1877년 정토진종이 부산에 동본원사 별원을 설립하고 부산·원산·광주 등지에서 포교 활동에 착수했다. 1895년에는
격변의 시대, 쇄국의 빗장이 풀리면서 새로운 문물·기술·종교·사상이 밀려들었다. 서당·서원 위주의 교육방식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885년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을 시작으로 교육시설이 늘더니 1905년부터는 전국 곳곳에 근대식 사립학교가 들어섰다. 불교계에도 경성에 동국대 전신인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하는 등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하고 있었다.1907년 해인사로 떠났던 만암 스님은 2년간의 강사 생활을 마치고 백양사로 돌아왔다. 스님은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대가람 해인사에서
만암 스님은 경전을 탐구하고 가르치는 강백이었다. 허나 태고보우 스님의 18대 법손임을 항시 가슴에 새겼다. 이는 수행자로서의 본분사(本分事)를 잊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권상로가 쓴 만암 스님 비문에는 ‘신축년(1901) 여름부터 벽면안거(壁面安居)하여 선지(禪旨)를 참구한 지 또 10년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가원이 찬술한 비문에도 ‘신묘년(1891)에서 경술년(1910)까지 책을 짊어지고 제방(諸方)을 유력하면서 교의를 연구했고, 이어서 면벽관비(面壁觀鼻)하면서 선의 오지(奧旨)를 참구한 지가 거의 20년이 됐다’고 적고
만암 스님은 운문암에서 강의를 시작해 다시 청류암(淸流庵)에서 강사 활동을 이어갔다. 청류암은 백양사에서 산길로 2km가량 떨어진 산내 암자로 고려 각진국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소요태능 스님 등 고승들이 수행했던 도량으로, 청정한 행과 마음으로 선정(禪定)에 든다고 해서 청류암이라 이름 붙여졌다. 조선 말기 백양사가 자연재해로 막대한 피해를 본 것과는 달리 청류암은 그나마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이곳에는 만암 스님의 문중 어른들인 연담, 양악, 침송, 허주, 한양 스님의 진영이 봉안돼 있고,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도
은사 취운도진 스님이 만암 스님에게 출가자의 길을 열어주었다면, 환응탄영(幻應坦泳, 1847~1929) 스님은 경전의 오묘한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도록 경안(經眼)을 밝혀주었다. 환응 스님은 만암 스님의 재능을 꽃피웠으며, 강맥(講脈)을 전해 강사의 길을 걷도록 이끌었다. 역사학자 이능화(1869~1943)가 ‘조선불교통사’(1918)에서 ‘환응 화상은 선(禪)과 계(戒)를 만암에게 전했다’고 명시한 것은 두 스님의 각별한 관계가 백양사를 넘어 널리 알려졌음을 시사한다.환응 스님은 강백이면서 선사였고, 율사였다. 백양사 주지를 지
불교에선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으려면 1만 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로세로 15km의 거대한 성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마다 한 알씩 꺼내 다 없어지는 시간이 1겁이다. 영겁과 같은 그 세월을 만 번이나 반복해야 스승과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스승은 길이고 자비다. 끊임없이 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스승의 가르침이 절실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감싸지는 않는다. 칠통(漆桶) 같은 제자의 무명을 깨뜨리기 위해 고함을 지르고 몽둥이를 치켜세운다.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천 길 낭떠러지로 밀어트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