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학 개론 가평에 가면 아침고요수목원이란 곳이 있다 들었다. 아직껏 가보지 못했지만 1960년대 어느 분이 그곳에 나무를 심기 시작해 50여년이 지난 지금 아름다운 숲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들고 주변은 모두 휴양단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안식처가 되었다니 참으로 50여년 세월을 장하게 보내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같은 얘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렇게 나무를 심은 것도 대단히 훌륭한 일이지만 모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끊임없이 보리수의 종자를 심으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흔히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없어”, “주변에 별반 좋은 인연들이 없어” 등의 이야기를 한다. 주변에 좋은 사람, 좋은 인연들을 많이
▲지광 스님의 가피이야기 한해가 막을 내린다. 지난 3년여간 써내려온 가피이야기도 이제 종언을 고한다. 보잘 것 없는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몇 번 쓰다 그칠 줄 알았는데 3년이 순간처럼 흘렀다. 부처님께 감사드린다. 생각해보니 온통 감사드려야 될 대상들이다. 하늘에 빛나는 태양 달 별 등 내 생명이 오늘까지 존재할 수 있도록 돌보아주신 불보살님들과 신장님들 모두에게 감사한다. 부처님께서 고맙지 않을 때라도 항상 고맙다하라 하신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느껴지는 것이 깨달음이다” 하신 말씀대로 우리의 본질이 부처님이요 빛이요, 기쁨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건 감사하지 않을래야 않을 도리가 없다. 모든 게 감사
▲지광 스님의 가피이야기 불교는 문자 그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몸과 마음이 하나인 종교요, 몸과 마음의 안녕과 평안을 도모하는 비결이다. 마음의 평안이 몸의 평안이요, 몸의 건강이 마음의 건강이다. 제법망견(諸法妄見)이라 무명이 불건강을 낳는다. 불합리한 고정관념이 병의 원인이요, 마음의 미혹이 질병이다. 흔히 스트레스란 말을 많이 쓰는데 스트레스란 아집으로부터 오는 것이요 마음의 탄력성 결여에서 온다. 정신적 스트레스와 육체적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느냐가 건강의 중요한 요체 중 하나다. ‘금강경’ 가르침대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이 스트레스해소의 묘방 중의 묘방이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제법망견인데 흘러가는
▲지광 스님의 가피이야기 누구나 일을 시작할 때는 자신만만하다. 시작할 때의 기세라면 무엇을 못해내겠는가. 그러나 일을 해 나가다보면 힘은 떨어지고 상황은 끊임없이 변해간다. 점점 어려워지고 힘겨워진다. ‘당초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던가?’ 회의가 들고, 추진력이 떨어진다. 이 같은 극한 상황에서 인간능력의 우열이 판가름난다. 어차피 무슨 일이든 쉬운 일이 있는가. 산다는 것은 언제나 힘겨운 일. 산다는 것은 부처님 말씀대로 일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는 일하러 왔다’ 말씀하셨다. 삶과 일은 둘이 아니다.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 하듯 바다에 풍랑이 멈추는 법이 있던가. 끝없이 흔들리는 바다, 배를 타고 항해하는 사람에게는 딱 두 가지 길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영원한 심판자가 계신다 말씀하셨다. 심판자이시기도 하고, 감독이나 코치로 부른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의 마음속에 위대한 심판자가 존재한다는 말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들 모두 언젠가는 완전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내용이라 할 것이다. 우리들 모두의 마음 가운데 존재하는 양심이라는 세계를 생각해 보면 좀 더 이해가 빠를 듯하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진리를 지향하는 불가사의한 실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수행자들이 깨닫는 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가운데 존재하는 위대한 심판자를 만나는 것이다. 견성성불이라 하지 않는가. 깨닫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
지광 스님의 가피이야기 자식이 아비의 은혜를 모르면 그를 ‘패륜아’라 부른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우리들을 나의 외동아들이라 하셨다. 육신의 부모는 나를 낳아주신 아비와 어미이지만, 법신의 어버이는 부처님, 관세음보살님이시다. 육신의 부모님 은혜를 모르는 것도 패륜이지만 법신의 부모님이신 부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무어라 불러야할까.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실상의 부모님이신 부처님 은혜를 까맣게 잊고 산다. 그를 일러 무명이라 부른다. 부처님께서 자신이 부처임을 모르는 죄가 가장 큰 죄라 하셨듯 자신의 참부모를 몰라보는 죄는 또 어떠한가. 우리들은 진정 스스로가 부처님의 아들, 딸임을 깨달아야한다. 자신의 참부모를 깨달아야한다. 중생들이 번뇌의 장애로
지광 스님의 가피이야기. 사람들은 이 세상을 매일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며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이 땅은 결코 당연한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이 그저 당연한 세상으로, 당연하게 보이는 것은 눈이 멀어서 그렇다. 눈을 열고 보면 이 땅은 찬연한 부처님나라다.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모든 현상을, 세상을 그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 세상은 부처님의 광명으로 가득하다. 이 땅은 부처님의 세계, 실상의 세계가 뿜어내는 찬연한 광명으로 빛나고 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은 모두 번뇌의 어둠 때문에 여래의 광명을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 깨달음이란 다른 게 아니다. 부처님나라에 눈을 뜨는 것이다. 실상에 눈을 뜨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적인 인생을 원한다. 인생승리, 성공의 법칙과 성불의 법칙이 전혀 다른 것일까? 사람들은 재물을 많이 쌓아올리고 명예를 드날리는 것을 성공으로 치부한다. 그 같은 성공은 영원한 것일 수가 없다. 영원과 함께하는 성공을 진정한 성공이라 부를 수 있고, 그 같은 성공은 성불의 법칙과 맥을 같이 한다. 성불의 법칙과 맥을 같이 하는 인생의 성공은 과연 어떠한 성공일까?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일에서건 남을 이기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겼다고 기뻐하는 것은 아직 자기가 약하다는 증거다. 상대할 적이 없을 만큼 강하면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초월하게 된다. 승패는 항상 일시적 현상이고 강한 인간, 성불의 인간은 승패를 이긴 인간이다. 결코 이겼다 졌다 괴로워 말라.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 적
점쟁이를 찾는 사람들이 꽤있다. 누군가가 뭘 봐준다고 하면 100% 신뢰하지는 않더라도 일단 호기심을 갖는다. 운명이 정해져있다 믿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 듯하다. 부처님께서는 운명이 정해져있다고 믿는 숙명론을 삼종외도라하여 크게 비판하셨다. 불교에서는 운명은 없다고 가르친다. 다만 업이 있을 뿐이라 얘기한다. 전생에 지은 업을 소멸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스스로의 마음을 고쳐먹으면 업장이 소멸되고 삶이 개조된다고 가르친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의 마음을 고치려는 사람이 적으니 업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탄하셨다.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면서 실제 자신의 마음을 고쳐먹으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불교는 정진을 통해 부처를 만드는 종교다. 결단을 통해 원을 세우고 그를 실천
부처님께서는 항상 “너희들 마음 가운데 부처님이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라 하셨지만, 진실로 그 같은 가르침을 확신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대는 그대의 마음 가운데 부처님 계심을 확신하는가? 부처님께서는 “믿고 의지하는 자의 염원은 반드시 성취된다”고 말씀하셨다. 밤낮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관세음보살님께 호소하며 관세음보살과 자신을 일체시켜야 한다. 왜 부처님과 관세음보살과 하나여야 하는가! 부처님과 하나 되는 길은 무한과 하나 되는 길이며, 나 자신의 참 가치를 구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하나가 되면 나의 가치는 무한이 된다. 부처님과 관세음보살과 하나 되는 길이 바로 자신의 참 가치를 드러내는 길이다. 그 같은 진리를 깨닫는 자는 부처님의 장자가 된다
부처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점검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외면하는 사람,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잘못에 둔감한 경우가 많다. 잘못에 둔감하고 계속 방치하다보면 계속 그릇됨이 커질 수밖에 없다. 흔히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하지 않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의 잘못에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다. 계속 자신의 잘못을 방치하면 도덕성, 법성이 약화되기 마련이다. 부처님 말씀대로 법성, 도덕성이 무뎌지면 그의 앞길에는 대단히 큰 문제가 생겨난다. 참회가 없는 자에게 내일이 없다하신 부처님 말씀을 상기해보라. 평상시에 열심히 훈련하지 않으면 전쟁이 터질 때 속수무책이다. 왜 평상시 자기수양이 중요한가. 평상시 자기를 닦지
사람들은 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또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만한 자비심을 베풀며 살아갈까. 우리들 모두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용기와 희망이 샘솟는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수가 많다. 나의 주인은 나이고, 나의 모두는 나의 것이기에 나의 모든 부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까. 나의 자기가 소중할 때 남의 자기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사랑을 표현하는데 대단히 어색해한다. 당신의 남편에게, 당신의 아내에게 얼마만한 사랑의 표현을 정겹게 하는가? 상대에게 가족들에게 항상 웃음 띤 얼굴로 대하는가? 상대에게 미소 짓는 가운데 더 깊은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점은 상대방
부처님께서는 육신을 겉옷이라거나, 한조각 구름이라 말씀하셨다. 『금강경』에서는 꿈결과도 같고 허깨비와도 같고 물거품 또는 번갯불 같다고도 하셨다. 모두가 허망하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겉옷은 해지면 버려야하고 한조각 구름은 속절없이 사라진다. 또 꿈결이나 허깨비 물거품 등은 얼마나 무상한가. 부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애지중지하는 인생을 어찌도 이렇게 허망하게 가르치셨단 말인가. 『육조단경』에는 上明下暗(상명하암)이라며 구름 낀 아래는 어둡지만 구름 위 하늘은 한없이 청명하다하셨다. 모두가 우리네들 인생이 뜬금없다 가르치신 내용들이다. 뜬구름이나 물거품 같은 우리네들 인생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열심히 정진하며 세상에 대한 애착을 떨치라 강조하셨다. 애착을 떨친 삶은 한 없이 평안하다. 부처님
길가에 핀 들꽃 한 그루에도 영원의 법칙이 들어 있다. 그들은 어떤 심오하고 탁월한 법칙 따라 싹이 트고 성장하며 피었다가 시든다. 공중에 흩어지는 눈송이들 역시 어떤 숭고한 법칙에 따라 모양이 만들어지고 떨어져 내리고 녹아 없어진다. 우리의 세계는 법칙의 세계인 법계요, 법신이요, 부처다. 부처님의 영원한 생명의 법칙, 생명의 원리를 통해 만물이 생겨났고, 지금도 쉴 사이 없이 생겨나오고 있다. 이 같은 부처님의 우주 대생명의 법칙, 우주 대 생명력과 우리는 하나다. 우주 대 생명력과 하나임을 깨닫고 그 힘을 활용하는 사람에게 부처님의 거룩한 가피와 의지가 항상 함께 하신다. 만 생명을 살리는 힘과 하나가 되면 무한한 평안과 안락이 그에게 깃든다. 천지만물이 모두 우주 대생명이신 부처님과 하나임을 깨닫는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면 엄마, 아버지는 천사가 된다. 그런 가정은 지상천국이 된다. 역으로 자녀들이 공부를 안 하고 부모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아빠, 엄마는 격렬해 진다. 당연히 그런 가정은 지상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 극락, 천당, 지옥은 죽은 다음에 열리는 세계가 아니다. 이 땅에서도 마음 쓰는 대로 열린다. 주변의 모든 사람을 천사로 만들거나 악마로 만드는 것은 모두 우리의 마음이다. 주변이 천사들로 가득하면 그는 지상천당 극락에 사는 것이요,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는 지상지옥 속을 헤맨다. 부처님 말씀대로 천당도, 지옥도, 삼계육도도 이렇듯 마음이 지어낸 허상이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허상 속에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모두가 자신의 마음이 지어낸 허상 속에 살며 실상을
세상에는 왜 이다지도 차별이 심한가.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단명자, 장수자, 빈천자, 존귀자, 벼슬이 높은 자, 낮은 자. 이것은 모두 부처님 말씀대로 기도 정진의 차이다. 모든 것이 실력 따라, 점수 따라 전개되는 세상인 것처럼 모든 차별도 자신이 지은 공덕 점수의 차이다. 열심히 공부했으면 좋은 열매를 거둘 것이고 제대로 공부를 안 했으면 나쁜 열매를 거두는 것과 같은 이치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며 공부하고 실천한 대로이다. 매일 자신의 삶을 자신도 평가하지만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평가하고 부처님께서도 평가하신다. 스스로가 매일매일 평가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한다. 매일을 시험 속에서 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그대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매일의 시험을 잘 치르고 있는가. 열심히 수행
물과 공기는 공통점이 있다. 둘은 대표적인 매질이다. 허광과 물은 모두를 알고 있다. 공기와 허공은 한 몸이다. 허공은 부처님의 몸이요, 마음이다. 부처님은 모두를 보고 듣고 알고 계신다. 『관음경』에 보면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은 악귀가 그 사람을 보지 못 한다고 가르친다. 왜 악귀가 기도하는 사람을 보지 못할까? 차원이 달라서다. 열심히 기도하는 마음이 허공에 차원이 다른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아우라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 주변에는 방탄막과도 같이 달걀모양의 방사능층이 있다. 지구도 성층권에 반알렌대라는 방탄막과도 같은 층이 있다. 기도하는 마음이 되면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행동 하나가 차원이 다른 층을 형성하게 마련이다. 의상대사가 천병들의 옹호를 받았던 것처럼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예전에 많이 듣던 노랫가락이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방랑자의 심리가 있다. 누구에게나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픈 마음이 있다. ‘인생은 나그네길’을 노래한 가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들 마음 가운데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잠재해 있다. 그대의 마음 가운데에도 무언가를 동경하는 마음, 영원한 그리움이 있지 않은가. 『법화경』에도 ‘우주의 무량중생들 모두가 한없이 떠돌고 있다’고 하셨다. 무량한 삼천대천세계를 여인숙처럼 이별 저별 넘나들고 있다는 것이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등 삼계육도 모두가 우리들의 여관이다. 지은바 업 따라 잠시 머물고 그 어디론가 끊임없이 떠도는 나그네길이 우리들의 인생행로다.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않으니 항
그 사람 눈에 독기가 있다, 살기가 있다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사람들에게서 강한 부정적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는 말이다. 화가 나 있는 사람의 호흡을 30초 동안 모아본 결과 모르모트(시험용 쥐) 60마리 정도를 살상할 수 있는 양의 독이 뿜어져 나오더라는 보고가 있다. 살모사의 독과 맞먹거나 능가하는 독이 사람의 몸에서 분비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삼독심으로 표현되는 탐진치로 인해 몸 안에 독물질이 생기고, 그 독물질이 강한 독소를 뿜어내는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뿜어내는 독소의 양이 얼마나 될까? 또 자동차의 배기가스, 공장의 매연가스 등을 합한다면 허공은 엄청난 양의 독소로 채워져 있을 것이란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선 무엇보다 사람들이 뿜어내는 이들 부정적 기운을 흡수해
불교는 한 생각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한 생각 깨치면 그 자리가 부처라 하고, 한 생각 어두우면 그 자리가 바로 중생이라 가르친다. 지옥도 다른 곳이 아니라 한 생각 함부로 쓰면 바로 그 자리가 지옥이라는 것이다. 한마디 말이 세상을 지옥으로 또는 극락으로 만들듯이 한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말도 함부로 하지 말라 하신 것처럼 생각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생각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함부로 일으킨 한 생각이 함부로의 운명을 걷게 하고, 허공계에 가득한 보이지 않는 부정적 존재들과 어떤 형태로든 생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들 상호간 생각으로 연결 돼 생각이 서로 읽혀지기도 하고 읽을 수도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선사들의 법거량을 통해 봐도 그 같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