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띠 수행은 부처님께서 행하신 가장 근본적인 정화법이자,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10년 가까운 방황은 결국 사띠 수행과의 인연으로 이끌기 위한 여정이었다. 사띠 수행에는 얇은 방석이나, 몸이 불편한 경우에는 의자에 앉아서 하는 좌념(念), 걸으면서 행하는 행념, 일상 속의 생활념, 일하면서 실천하는 노동념, 마음을 비우는 공(Sunna) 수행, 그리고 자애를 전하는 자애(Metta) 수행 등이 있다. 이는 육체뿐 아니라 마음의 건강과 에너지 회복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일반적으로 좌념보다 행념이, 행념보다 생활념이나 노동념의
중학생 때 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 공부를 위해 고향 산골의 한 사찰에 머물렀다. 사찰 인근의 작은 토굴에서 수행하시던 한 어르신을 통해 처음으로 호흡명상을 접했다. 가끔 나를 불러 이런저런 말씀을 들려주셨는데, 그분은 ‘명상’이라는 말 대신 ‘호흡, 수련, 수행’이라고 하며 호흡하는 법을 이렇게저렇게 가르쳐 주셨다. 수행으로 다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지금, 돌아보면 수행을 내게 처음 알려주신 참으로 고마운 분이었음을 느낀다.세계보건기구는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이 없거나 몸이 허약하지 않은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정신·
그 후 며칠 동안은 별일 없이 기분 좋게 지냈다. 그러다 갑자기 예전에 했던 고민들이 폭탄처럼 한꺼번에 터졌다. 법문을 계속 들으라는 말씀이 생각나 그날 이후 유튜브로 법문을 매일같이 들었다. 들을수록 온몸으로 빨려 들어오는 듯했고, 한 번씩 뭔가 깨지며 환히 밝아졌다가 다시 힘들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점차 마음이 안정돼 갔다.그러던 중 광주광역시에도 조사선 공부를 하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찾아간 곳이 신형록 선생님이 법문하시는 월인선원이었다. 틈날 때마다 법회에 참석했고, 법회가 끝난 뒤 선생님과 도반들이 함께하
대학교 4학년을 앞두고 휴학 후 혼자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 남부 작은 마을 해변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순간, 경이로움과 황홀함이 몰려왔지만 곧 알 수 없는 공허가 스며들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원하는 풍경을 보고 있는데… 왜 이렇게 답답하지?’ 자유로움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감옥 같은 이질감이 엄습했다.20대 내내 ‘나는 왜 태어났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헤맸다. 고민 끝에 퇴사하고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지만, 막상 유학 준비에는 도
인도 성지순례와 보드가야 대기원법회는 내 마음을 흔들었고, ‘불교를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열망은 점점 커졌다. 그러나 당장 현실의 삶을 정리하고 인도로 떠나 승원 교육을 받을 수는 없었다. 나이도 들고, 환경도 따라주지 않아 ‘모든 게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다행히 삼학설행사 주지 남카 스님은 지난해 도반들의 요청으로 ‘날란다 코스’를 개설했다. 티베트 승원의 20년 장기 교육을 4년으로 압축한 과정으로, ‘보리도차제론(람림)’과 불교철학을 함께 배우며 방편과 지혜 두 날개를 닦도록 설계됐다.공부할수
2013년, 지인의 소개로 집 근처 절의 불교대학에 다니기 시작하며 처음으로 부처님 법을 접했다. 그 전까지는 오직 나 자신의 일과 진로만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법문을 듣고 절에 다니는 일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게다가 신행에는 봉사도 수반되었는데, 불교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남을 돕는 일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점이 버겁게 다가왔다.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차츰 법문을 듣고 수행하는 일상이 익숙해졌고, 내면에도 안정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해마다 한두 차례 참여했던 위빠사나 집중수행은 초반에는 힘겨웠지만, 시간이 지나며 난생 처음
법회가 끝난 뒤, 숭산 스님의 제자 바바라 선사님과 함께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용기 내어 물었다. “무엇이 부처님의 법입니까?” 선사님은 슬며시 웃으며 되물었다. “부처님 법 밖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금발의 외국인이 주름진 얼굴로 조용히 웃으며, 단번에 한 방 ‘땅!’ 하고 때리는 듯했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려운 한자도, 복잡한 교학도 없이 단순하고 명쾌했다. ‘저게 뭐지? 숭산 스님의 제자들은 다들 저런 게 되는 건가? 무섭지만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그렇게 시작된 공안 인터
국민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종교를 접했다. 동네 교회에서는 목사님 부부가 아이들을 불러 실내 놀이기구에서 놀게 해주고, 떡볶이도 나눠주며 “언제든지 오라”고 말했다. 친구들과 함께 우리는 자연스레 교회를 자주 드나들었다.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진지한 얼굴로 우리를 지하실로 데려갔다. 복도에 그려진 지옥도를 가리키며 “지금 너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저기서 불타고 있다”고 말했다. 단지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는 이유로 돌아가신 양가 할아버지들이 지옥에 있다는 말에 심사가 몹시 뒤틀렸다. 결국 손에 들고 있던 떡볶이를 내려놓고, 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살길이 열렸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연극 작업과 수업이 어려워졌고, 여러 사정이 겹치며 한동안 일을 쉬게 됐다. ‘오히려 잘됐다. 이 기회에 제대로 공부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다.우연히 해인사 소림선원장을 역임한 효담 스님의 법문 영상을 보게 되었다. 단박에 ‘이분이다’ 싶었다. 마침 서울의 가야산선원에서 스님이 법문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법회에 참석해 처음으로 스님을 뵀다.효담 스님은 밝고 힘찬 기운 속에, 깊은 산중의 난초 같은 고고한 멋을 지닌 분이셨다. 그 향기에 취해서였을까. ‘깨달음’이니 ‘해탈
인생이 이미 연극인데 그 속에서 또 연극을 했다. 대학교 연극동아리에서 시작해 20~30대 내내 연극을 하며, 주로 대본을 쓰거나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다 30대 후반쯤 마음공부에 관심을 갖게 됐다.처음엔 서구 영성가의 책에서 시작해 기독교, 힌두교 서적을 조금씩 읽어 나갔는데, 공교롭게도 책에서 인용한 선사(禪師)들의 일화나 법문이 더 강하게 끌렸다. 그래서 찾아보니 유튜브에 막대한 양의 선(禪) 법문이 있었다. 선은 소수의 출가자에만 해당하는 비밀수행인 줄 알았는데, 그 개방성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3~4년쯤 정신없
2024년, 서울 삼학사에 4년제 날란다 코스가 개설됐다. 나는 ‘람림’과 불교철학, 그리고 인명학(뒤다)을 이수하고 시험까지 치른 뒤 올해 2학년이 되었다. 늘 회사 일과 집안일에 쫓기며 공부를 했기에, 수업 시간 외에 따로 공부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수업에 참석하려는 의지를 다졌고, 모든 개인 일정을 수업에 맞춰 조정했다. 놓친 수업은 출퇴근 시간에 운전하며 녹음 파일을 들으며 공부했다. 그런 노력들이 쌓이고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삼학사 주지 남카 스님의 수업 내용이 조금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지난해 불교철
운이 좋게도 ‘람림’ 수업이 개강하던 시기에 ‘라마최빠’(스승께 공양을 올리는 심오한 도의 의궤) 기도와 밀교 수업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처음 접한 ‘라마최빠’ 기도는 무상요가에 해당하는 수행이었다. 티베트어로 따라 하는 기도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고, 스님께서 하시는 수인(手印)은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스님의 가르침과 기도집에 적힌 대로 따라 했지만, 관상은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루 종일 내 정수리 위에 모든 스승님을 모시고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의지할 수 있는 의지처가 있다는 것이
“저는 대승의 불자입니다. 삼보에 귀의하고 사법인을 인정하며, 출리심과 보리심을 닦기 때문입니다.”나는 모태 신앙으로 불교 외에 다른 종교를 믿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절 수행에 매우 열심이셨고, 우리 가족은 언제나 절을 중심으로 여행을 다닐 만큼 신심이 깊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는 흔히 말하는 초파일 불자에 머무르며 부처님오신날에만 인천 용화선원을 찾는 것이 전부였다.부모님과 오랜 인연이 있는 양산 환희정사는 내가 언제든 편하게 머물 수 있는 비구니스님의 절이다. 주지 상조 스님께서 어느 날 “아들은 반
2009년 불교를 더 깊고 체계적으로 공부해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전하고자 동국대 선학과에 입학했다. 박사과정에서는 천태 스님의 ‘마하지관’을 주제로 삼았고, 그 가르침을 실참 수행으로 검증하기 위해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의 지도 아래 7일간 간화선 집중 수행에 참여했다.당시 수불 스님이 제시한 화두는 “나로 하여금 손가락을 까딱거리게 하는 이놈이 무엇인가!”였다. 화두를 들자 분별망식이 단박에 끊어지며 ‘이 뭐꼬’라는 의심이 온몸으로 들려왔다. 이튿날부터 좌선을 이어가자 강한 에너지의 흐름이 전신을 관통했고 몸이 진동하며 통증도 뒤
내가 9살 때 한의와 양의를 겸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11살 때는 항상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연이어 12살 때 친딸처럼 나를 돌봐주시던 큰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이때 느낀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사람은 어디서 오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생각하게 됐다.아버지가 양양읍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당시 남대천 다리 밑에는 거지가 많았다. 그들은 아침마다 밥 담는 그릇을 들고 동냥하러 다녔는데 사람들로부터 천대와 조롱을 받았다. 나는 그들이 우리와 똑같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간화선은 화두를 들고 의심하여 그것을 타파하고, 나아가 돈오(頓悟)의 힘으로 공부를 지속해 나가는 수행이다. 선지식은 공안을 제시하여, 믿음으로 수행 길에 들어선 이로 하여금 화두 의심을 일으키도록 이끌어 준다. 그렇게 잡들어진 활구의심(活句疑心)을 통해 각자의 시절 인연에 따라 화두 의심이 타파되면, 마침내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된다. 즉, 깨닫는 것이다.깨닫기 전, 궁금하여 알려고 하는 단계에서는 스승이 “이 뭐꼬?”라고 물으며 제자에게 화두를 걸어준다. 이 과정에서 수행자는 자연스럽게 화두를 풀려고 애쓰며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여러분, 저 보이십니까?”“네.”“무엇이 저를 봅니까?”“눈이 봅니다, 내가요, 정신이요, 마음이요, 의식, 영혼….”“지금 여러분은 입으로 온갖 답을 내놓았지만, 그것은 언어지 언어가 가리키는 실물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답은 모두 관념일 뿐,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면 여러분의 말문이 막힙니다. 말문이 막힘에도 여전히 보는 것은 있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답하셔야 합니다. 답을 찾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갑갑해질 것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포기하고 싶겠지만, 여러분은 오직 답을 찾는 데
고요와 적막에 쌓인 이른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이뭐꼬’를 챙기며 하루를 맞이한다. 오늘은 새해 들어 처음으로 인사동선원 일요일 공부 모임이 있는 날.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어 선원으로 향한다. 나의 생활 터전이었던 서울 신촌은 1990년대 학생운동과 진압으로 최루탄 가스가 난무했고, 2000년대에는 밤낮으로 음주와 향락의 인파가 넘쳤다. 사회적 갈등으로 반목과 불신이 만연하던 시기였다.이 같은 시대적 상황과 직장의 권위적인 조직문화에 대한 불만과 회의로 방황했다. 왠지 모를 허전함과 삶의 이유에 대해
화면이 멈추듯이 툭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현상을 겪은 날부터 마치 한 짐 내려놓은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무심선원 김태완 선생님과 면담하니 별다른 말 없이 꾸준히 공부를 이어가라고 조언했다.그날도 법문을 듣고 있었다. 선생님이 “이것입니다” 하며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데, 순간 온 우주가 확 열리며 ‘이것’과 딱 하나가 되어 드러났다. 나도 모르게 ‘앗!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라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때부터 이해되지 않았던 법문이 비로소 내 얘기처럼 소화되기 시작했다.체험 이후부터 강박적으로 완벽을 지향한 ‘내 모습’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쯤 문득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사는 것이지? 사는 게 이게 다인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어느 날 아침에 라디오를 듣는데 명상법 내용이 흘러나왔다. 단순 호기심에 며칠 동안 따라 했다. 그러던 중 어떤 생각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어느덧 생각의 끝에 다다르니 ‘어떻게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더니 머리가 맑아지면서 어떤 체험을 했다. 마치 구름 위를 거닐듯 날아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