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18일 전 총무원장 의현 스님에 대한 재심호계원의 징계 감형 결정으로 조계종은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재심호계원은 이날 1994년 멸빈 징계를 받은 의현 스님에 대해 공권정지 3년으로 감형했다. 의현 스님이 1994년 6월8일 초심호계원으로부터 멸빈 징계를 받았지만, 결정통지가 당사자에게 전달되지 않아 징계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이날 21년 만에 의현 스님에 대한 재심심판을 진행하고, “1994년 총무원장으로서 종단을 혼란케 한 점은 결코 작은 죄가 아니지만, 지난날의 과오를 참회하고, 20년
자승 스님의 총무원장 재임기간은 격변기였다. 33대 총무원장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아 서울 강남 봉은사 직영전환 문제로 극심한 혼란을 맞았고, 화쟁위원회 중재로 안정을 되찾자 템플스테이 예산 파동으로 정부와 대척점에 섰다. 자성과 쇄신결사로 종단 변화의 토대를 닦았지만 백양사 도박사건으로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안정과 혼란의 ‘롤러코스터’가 계속되면서 조계종은 조용한 날이 많지 않았다. 2012년 6월7일 대국민참회와 종단 쇄신안을 발표한 자승 스님은 공언대로 종단 쇄신에 착수했다. ‘사찰예산회계법’ ‘사찰운영위원회법’을 개정하면서
2010년 3월 서울 봉은사 직영전환의 후폭풍은 예상보다 컸다. “봉은사 직영전환에 여당 대표의 외압이 있었다”고 주장한 명진 스님은 일요법회 때마다 거친 발언을 이어가면서 논란을 키웠다. 정치권은 그해 6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봉은사 직영’을 정쟁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조계종 혼란은 가중됐다.봉은사 직영전환 혼란은 총무원 집행부가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었다. “수도권 포교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더라도 봉은사를 직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공청회 등 대중에게 이해를 구하는 작업들이 선행됐어야 했다. 그러나 총무원 집행
현대조계종사에서 자승 스님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든든한 문중의 뒷배도 없이 50대에 총무원장에 선출됐고, 숱한 저항과 도전 속에서도 재임에 성공해 4년 임기를 두 번이나 꽉 채웠다. 1962년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청담, 의현 스님이 총무원장을 연임했지만, 4년 임기 두 번을 모두 채운 것은 자승 스님이 유일하다. 총무원장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상월선원 결사, 만행결사를 이끄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자승 스님은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19세 되던 해 “출가수행자로 살겠다”며 산문에 들었다. 1972년
“남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했고, 수행보다는 명리를 탐하였습니다. 칭찬보다는 비방을 일삼았으며, 지혜보다는 지식 얻기를 즐겼으며 화합보다는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수행인의 본분은 망각한 채 교만하고 방일했습니다. 지금의 위기와 고난이 졸음을 깨우는 경책의 죽비소리임을 알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것입니다.”(영진 스님, 봉암사결사 60주년 기념법회 참회문, 법보신문 2007년 10월19일자)2007년 10월19일, 전국선원수좌회 의장 영진 스님의 참회문이 문경 봉암사를 둘러싼 희양산에 울려 퍼졌다. 조계종 실상을 적나라하
지관 스님은 뛰어난 학승이었다. 오랜 기간 해인사 강주와 동국대 교수를 역임해 조계종 내에서 상당수 스님들이 문중을 떠나 제자그룹으로 분류됐다. 그렇기에 지관 스님에게 드러내놓고 반기를 들 수 있는 스님이 많지 않았다. 여기에 해인사 주지와 중앙종회 부의장, 동국대 총장 등을 거친 종무 경험은 32대 총무원 집행부가 연착륙하는 배경이 됐다. ‘종단안정과 화합’을 기치로 내건 지관 스님의 첫 행보는 98년 멸빈자 사면이었다. 94·98년 멸빈자 사면은 전임 총무원장 정대·법장 스님이 역점을 두고 추진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앙종회의 반
2005년 10월31일 세간의 이목이 조계종으로 향했다. 이날 조계종은 법장 스님의 입적으로 공석이 된 총무원장을 새롭게 선출했다. 종단 안팎을 넘나들며 이슈의 중심에 섰고, 마지막 육신마저 사회에 회향한 법장 스님의 행보는 조계종의 사회적 위상을 견인했다. 그렇기에 누가 법장 스님의 뒤를 이을 것인가는 종단 안팎의 주된 관심사가 됐다.32대 총무원장 선거는 지관·정련·법열·월서·대우·각명·장주 스님이 후보등록하면서 다자구도로 출발했지만, 선거막판 종책모임의 지원을 받은 지관 스님과 정련 스님의 양자대결로 굳어졌다. 지관 스님은 당
2003년 3월24일 제31대 총무원장에 취임한 법장 스님은 종단현안 해결에 착수했다. 첫 과제는 94·98년 멸빈자 사면이었다. 멸빈자 사면은 30대 총무원장 정대 스님 때부터 추진된 사안이지만, 중앙종회의 반발로 번번이 무산됐다. 이런 가운데 종정 법전 스님이 그해 1월5일 신년하례 법회에서 “징계자 사면을 진행해 종단 구성원 모두 화합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사면논의에 다시 불을 지폈다. 원로회의도 2월27일 총무원장을 인준하면서 이례적으로 유시를 발표해 “징계자에 대한 전면적 사면을 시행하라”고 촉구했다.(법보신문, 2003년
2005년 9월11일 오전 조계종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날 새벽 3시50분 총무원장 법장 스님이 심장수술 후유증으로 입적했다. 현직 총무원장의 입적은 1971년 청담 스님과 1979년 경산 스님(개운사·조계사 총무원 분규 당시 조계사측 총무원장)에 이어 세 번째였다. 법장 스님의 입적은 뜻밖이었다. 9월5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할 때만 해도 간단한 심혈관 수술로 여겼고, 수술경과도 좋아 일반병실에서 회복기를 맞고 있는 상태였다. 총무원 사서실은 “일주일 후 종무에 복귀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연합뉴스, 2005년 9월9일자)
1999년 11월15일, 조계종 제30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정대 스님이 선출됐다. 이날 정대 스님은 선거인단 318명 중 307명이 참석한 가운데 166표(54%)를 획득했다. 134표(44%)를 얻은 지선 스님과는 32표차였다. 선거에 앞서 종단 안팎에서는 지선 스님의 우세를 점치는 분위기였다. 유력한 후보였던 고산 스님이 불출마한 데다 중앙종회 최대계파였던 ‘육화회(직지사단)’와 실천불교전국승가회를 중심으로 한 ‘일여회(훗날 무차회)’가 지선 스님 지지를 표명한 상태였다. 육화회와 일여회 소속 종회의원과 교구본사주지 60여명은
“나는 한번 하고자 하는 일은 그 누가 반대해도 하고 마는 성정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출현해서 못하게 한다면 그만두지, 그렇지 않고는 지금까지 중도에 폐한 일은 없었다. 이러한 의지로 강사와 법사와 포교사와 율사와 선사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지리산의 무쇠소’, 조계종출판사)조계종 제29대 총무원장 고산 스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혔듯 평생 수행자로서 강직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인물이었다. 옳다고 믿는 일에는 물러섬이 없었고, 부처님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여길 때는 단호히 거부했다. 1999년 총무원장 재선거를 거부하고 스
1998년 가을, 조계종에 또 한 번 폭풍이 몰아쳤다. 월주 스님의 총무원장 3선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더니 급기야 폭력사태까지 발생했다. 3선을 반대하는 스님들이 총무원을 접수하면서 조계종은 내분으로 치달았다. 1994년 종단개혁을 선언하며 대대적인 제도혁신에 나섰지만 권력을 향한 스님들의 욕심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총무원장 자리를 두고 발생한 스님들의 ‘혈전’으로 조계종은 세간의 따가운 비판에 내몰렸다.이 소식은 고산 스님에까지 전해졌다. ‘지리산의 무쇠소’(고산 스님, 조계종출판사)에 따르면 이 무렵 고산 스님은 통영 연
현대조계종사는 파란의 연속이었다. 때론 거센 풍랑을 만나 방향을 잃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조계종사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혼란의 시기 때마다 종단 길잡이가 됐던 스님들의 역할이 컸다. 1960~70년대 영암 스님이, 1980~90년대 탄성 스님이 대표적이다. 영암 스님은 1967년 청담·경산 스님이라는 두 실력자의 동반퇴진, 1975년 종정중심제 논란으로 갈등이 심화될 때마다 총무원장을 맡아 갈등을 봉합하고 종단 안정의 초석을 세운 인물이다. 탄성 스님도 그 계보를 이었다. 스님은 1980년 신군부에 의한 10·27법난 때 정
1990년 6월22일 의현 스님은 조계종 중앙종회 100차 임시회에서 제26대 총무원장으로 당선됐다. 1962년 통합종단조계종 출범 이후 의현 스님이 당선되기 전까지 총무원장 평균임기는 1년2개월에 불과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6개월이 멀다하고 총무원장이 바뀌는 혼란이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4년 임기에 이어 재임까지 이룬 것은 조계종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의현 스님은 이날 “불교방송 지방국 확대, 불교회관 건립 등 교세 확장과 중흥을 위한 사업추진을 약속”하며 새로운 임기 4년의 첫발을 내디뎠다. 의현 스님 재임 후
현대한국사에서 1987년은 커다란 변곡점이었다. 군사독재권력에 맞선 ‘6·10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고, 한국사회 전반에 제도적 민주주의의 토대가 갖춰졌다. 불교계 내부에도 적지 않은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불교의 자주화와 불교관계악법철폐’를 촉구한 1986년 9월7일 해인사 승려대회를 계기로 불교의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정권에 유착했던 기존 불교계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통해 국가권력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요구하는 자성과 쇄신의 바람이 불교계 내부에서 확산됐다. ‘민중불교론’을 토대로 성장한
현대 조계종사에서 의현 스님만큼 인색한 평가를 받는 총무원장도 드물다. 의현 스님은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4년의 임기를 채웠으며 재임까지 이뤄낸 최초의 총무원장이었다. 재임기간 불교방송 개국과 중앙승가대 4년제 인가, 불교텔레비전 개국의 초석을 다진 것 등 당시 한국불교의 수많은 숙원과제들을 해결하는 성과도 냈다. 그럼에도 의현 스님은 여전히 ‘반개혁적 인물’로 낙인찍혀 있다. 1994년 개혁회의로부터 종단 밖으로 내몰린 이후 현재까지도 조계종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비운의 삶을 살고 있다.의현 스님은 1936
현대조계종사는 부침의 연속이었다.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하기까지 비구·대처의 갈등을 겪어야 했고, 불교정화 이후에는 종단운영 주도권을 두고 대립과 반목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때론 종단이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계종이 오늘날 전통종단으로서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은 불교재건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몇몇 스님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녹원 스님도 그런 인물이었다.스님은 1950년대 비구·대처 갈등이 심화되자 불교재건비상종회위원을 맡아 통합종단조계종 출범의 토대를 닦았고, 1970년대 조계종이 개운사
녹원 스님이 조계종 제24대 총무원장에 선출된 것은 1984년 8월1일이었다. 이날 비상종단에 반발한 원로와 중진스님들은 합천 해인사에서 전국승려대표자대회를 개최했다. 1983년 9월5일 서울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진경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리고 비상종단을 출범시킨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때였다. ‘동아일보(1984년 8월2일자)’에 따르면 이날 승려대회에는 조계종 원로와 중진, 전국사암주지, 선원, 강원 대표 등 1700여명이 참석했다. 승려대회에 1700여명의 스님들이 참석한 것은 이미 대중들의 마음이 비상종단에서 떠
1983년 12월22일, 서울 조계사 담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속초 신흥사 폭력사건으로 출범한 비상종단 총무원장 서운 스님 측이 총무원을 접수하기 위해 뚫은 구멍이었다. 서운 스님 측은 인수인계를 거부한 진경 총무원장 측이 버스를 동원해 조계사 출입문을 봉쇄하자, 쇠망치로 가로세로 1m 크기의 구멍을 뚫었다. 이 구멍을 통해 서운 스님 등은 조계사에 진입했고, 경찰과 법원 집달관을 앞세워 총무원 청사를 접수했다. 이로써 1983년 9월8일 종정 성철 스님으로부터 조계종 22대 총무원장에 임명된 서운 스님은 봉은사 총무원을 나와
1982년 3월25일, 조계종 제20대 총무원장 법전 스님이 사퇴를 선언했다. ‘절구통 수좌’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정진력과 인욕이 몸에 밴 스님이었지만,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성수 스님의 불신임으로 시작된 1980년대 총무원장 수난사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1981년 1월 종헌개정으로 총무원장은 종단의 대표권과 종무행정의 실질적 책임자로서의 막강한 권한이 부여됐지만, 현실은 사뭇 달랐다. 종단운영을 두고 총무원장과 중앙종회는 번번이 대립했고, 그 결과는 늘 중앙종회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당시 종단권력의 중심이 중앙종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