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은 유난히 미술과 관련된 큰 사건들이 많았다. 조영남 대작사건부터 이우환 화백과 고(故) 천경자 화백의 작품 진위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으로 큰 조명을 받은 미술적 문제들이 터졌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다양한 전문가들이 나와서 인터뷰도 하고 칼럼도 소개되었지만, 뾰족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이들 모두 미술사의 난제들인 셈이다. 더불어 정답을 찾아내지 못한 전문가들의 발언에 예술이란 원래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인식만 부각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특히나 이들 사건들은 작품의 창작자가 살아있거나 혹은 작고했더라도 분명
‘야단법석’.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는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모습을 뜻하는 말이지만, 이것이 원래는 야외에 법석을 편다는 뜻이라는 것은 불자들에게 익히 알려진 바이다. 왜 법당 안에 펴던 법석을 야외로 옮겨야했을까? 이에 대해 연구자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서 억불숭유 정책이 본격화되자 불교교단이 점차 대중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원인이라는데 대체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대중들을 위한 집회는 보다 큰 규모로 열리게 되었고, 법당 안에서는 이들을 모두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야외 법회로 자연스럽게 확장된 것으로 본 것이다. ‘야단
사천왕은 우주의 사방을 관장하는 네 명의 신이다. 각각의 천왕이 상징하는 네 방위, 즉 동·서·남·북은 우주의 모든 공간을 대표한다. 사천왕이 사는 사천왕천 위에는 도리천이 있는데, 이곳은 제석천이 머무는 곳이다. 이들 제석천-사천왕으로 이어지는 위계는 바로 인도 카스트의 4계급 중 두 번째 왕족·귀족계급인 크샤트리아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탑 든 사천왕이 북쪽 우주 상징다문천이며 비사문천으로 불려고려까지 오른쪽 안쪽에 있다가조선시대에 왼쪽 안쪽으로 이동통일신라에서 고려 시대까지는본존불이 동쪽, 조선시대엔 남쪽향했다는 전제
중원에서는 당(唐) 제국이 발흥했던 7세기 무렵 티베트에서 송첸캄포(재위 629~649)라고 하는 왕이 등장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8세기에는 치송데첸이라는 왕이 인도로부터 파드마삼바바를 초빙하여 본격적으로 티베트 불교의 기초를 닦았다. 이 무렵 불교의 탄생지 인도에서는 오히려 점차 불교가 쇠퇴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 세계불교의 중심은 점차 티베트로 옮겨가고 있었다. 급기야 13세기에 티베트는 원 제국에 점령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이를 계기로 샤카 판디타와 그의 조카 파스파와 같은 고승들에게
아미타내영도란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해 마중 나오는 아미타불을 표현한 그림이다. 이 도상이 과연 내영도인가 아니면 수기도인가에 대해서는 지난해 연재한 ‘쟁점 한국불교미술사’에서도 다룬 적이 있다. 여기서는 그중에서도 매우 특출한 작품 한 점을 집중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리움 소장한 아미타삼존내영도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 등장관음보살은 극락세계로 타고 갈연꽃 마련할 만큼 적극적 모습중국 아닌 서하에 존재한 양식고려, 실크로드 직접 교류 의미리움 소장 내영도는 서하불화에기본을 두고 새 아이디어 더해파격이라 할 정도 독특
수월관음도란 달이 뜬 배경으로 바닷가 바위에 관음보살이 앉아있는 모습을 그린 것을 말한다. 이 장면은 ‘화엄경’의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인도 전역을 순례한 이야기 중에서 28번째로 포탈락가(Potalaka) 산을 찾아가 관음보살을 만나 가르침을 구한 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日 다이토쿠지 소장 수월관음도선재동자 자리에 용왕 그려 넣어‘삼국유사’에 전하는 의상 대사의낙산사 창건 설화속 인물설 제기고려인들의 자부심 담아낸 작품최근 용왕 등장 中 수월관음 소개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난 현상이란기존의 학계 주장 뒤집어진
2008년 성남 판교의 한 건물지에서 금동불좌상 1구와 금동보살좌상 2구가 발굴되었다. 인근에서 석탑 부재 및 청동으로 만든 소형 탑의 꼭대기 부분이 함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사찰이 있었던 자리로 짐작되는 곳이었다. 특히 불좌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는 드물게 비로자나불의 수인인 지권인을 하고 있었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이국적인 모습이었으며, 조각기법도 훌륭한 편이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두건 걸치고 있어 지장보살이며본존불 협시보살로 소개 됐으나함께 출토된 본존불이 더 작자삼존불 조성 아니라는 주장 제기좌상이 승려상일 가능성도 등장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은 종교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새벽 마을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큰 종에서부터 법당 안에서 낭랑하게 울리는 작은 방울종에 이르기까지 종은 옛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신호의 수단이었다. 물론 북도 있고, 나팔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위엄이 있을 뿐 아니라 한 번의 타격으로 가장 오랫동안 소리를 내는데 있어서는 종이 가장 유용했을 것이다.종의 용 고리에 달라붙은 음통中 편종에선 손잡이 기능했고한국선 장식-음향적 기능 견해악기 만파식적처럼 소리 통해중생들의 감화 바라는 뜻 해석타종 후 잔향 오래 울
영주 부석사는 의상대사께서 창건한 사찰이며, 이곳의 법당인 무량수전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고려시대 건축물로 널리 소개되고 있다. 고려시대 건축은 그 밖에 강릉의 객사문, 북한의 심원사 보광전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 중에서 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꼽는다면 단연 부석사 무량수전이 아닐까. 다섯 칸이나 되는 장중한 평면구성, 그러면서도 하늘로 날아올라갈 것 같은 경쾌함이 조화를 이루고, 장식을 절제하면서도 구조부재의 짜임새 자체가 마치 장식처럼 보이는, 그래서
1966년 9월13일, 불국사 석가탑이 도굴 당했다는 기사가 떴다. 우리나라 문화재의 상징과도 같은 석가탑의 도굴은 당시로서는 얼마 전 국보1호 숭례문이 불에 탄 것처럼 사회적으로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필자는 그 당시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다) 도굴꾼은 자동차 타이어를 교환할 때 사용하는 휴대용 리프트 잭으로 사리공이 있는 탑신을 들어 올려 그 사이로 손을 넣어 사리장엄구 일부를 꺼내간 것으로 보이는데, 무리하게 들어 올린 탓에 석재가 일부 떨어져 나가고, 탑신이 뒤틀리면서 석가탑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결국 1966년
지난 글에서 다룬 석굴암의 10대제자상에 이어 오늘 소개할 감실보살상 역시 많은 논쟁거리를 낳고 있다. 감실보살상은 석굴암 후실의 10대 제자가 둘러선 벽 바로 위로 천정의 돔이 시작되는 부분에 둘러선 총 10개의 감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 안에 봉안된 보살상들을 말한다. 감실은 10개이지만 현재 2개는 비어 있어서 모두 8구의 상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혹자는 비어있는 두 개의 감실에 있던 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초대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게(曾根荒助)가 가져갔다고도 했다.본존불 정체 놓고 석가모니불아미타불·비로자나불 등 분분보살
십대제자(十代弟子)란 흔히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열 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석가모니의 제자로는 16나한, 또는 18나한도 유명한데, 석가모니의 아들이었던 라훌라만 공통으로 들어가고, 그 외에는 겹치지 않는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인데, 십대제자는 모두 아라한과를 얻었으므로, 제자나 나한이나 사실상 유사한 의미로 통용된다.십대제자 근거가 되는 경전 중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유마경’석굴암 조성된 십대제자 각각을경전 언급된 제자와 연결할 때열 명의 배열이 보기 따라 달라순서를 생각하는 개념
박물관에 가보면 크고 작은 다양한 불상을 수없이 접할 수 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극히 작은 불상으로부터 수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에 이르기까지 불상은 실로 매우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졌다. 이 상들의 크기는 만들어질 당시에 어떻게 정해졌을까? 물론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경우라면 예술가 마음이겠고, 주문생산인 경우라면 주문자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크게도, 혹은 작게도 만들어졌을 것이다.황복사지 탑서 발견한 불상 중입상은 14.4㎝, 좌상은 12.2㎝전통적 단위 척 30㎝-치 3㎝를기준할 때 발원문의 6치와 달라주나라 1척 20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 특별전에서 유독 관람객의 관심을 받았던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거대한 석조반가사유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국보 78호와 83호 반가상이 나란히 함께 전시된 것도 화제였지만, 이들 두 국보 반가상은 원래부터 유명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석조반가상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었는데 상반신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그 크기, 그리고 돌을 마치 흙을 빚어낸 듯 부드럽고 섬세하게 조각해낸 뛰어난 기량에 많은 분들이 감동을 받았다.
불상이 가사를 걸치는 방법에는 크게 통견식과 편단우견식의 두 형식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통견은 양쪽 어깨가 모두 가사로 덮여 있기에 나온 말이고, 편단우견이란 가사를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는 노출시킨다는 의미이다. 편단우견의 대표적인 불상은 석굴암 본존불상인데, 특히 항마촉지인을 결한 불상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황룡사지·영주 숙수사지 비롯해단석산 신선사의 마애부조까지경주 중심 신라 영토였던 곳서편단우견 불상 집중적으로 발견삼국 중 신라는 바닷길을 통해인도 아쇼카왕 세우려던 장육상조성 계획 이어 받아 황룡사
분황사는 수학여행의 상징이다. 불국사, 석굴암과 더불어 수학여행지로 널리 알려져 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공간이다. 오히려 접근성에 있어서는 불국사, 석굴암보다 뛰어나지만 실은 그만한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들처럼 다양한 볼거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 신라인들에게 있어 분황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남쪽으로 길 건너 바로 있는 황룡사와 함께 과거불의 일곱 설법처 중의 하나로서 막중한 것이었다.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세운모전탑은 신라 최초 석탑 추정현재 3층만 남아 있을 뿐이
국립경주박물관의 대표 유물 중 하나인 삼화령 미륵삼존불은 특히 협시보살이 귀엽고 예쁘기로 유명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해외전시에 협시보살상 중 한분만 별도로 모셔다 단골로 출품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만큼 신라, 나아가 우리나라 불심의 얼굴을 대표하는 상이라 할만하다. 이들 보살상이 귀여워 보이는 이유는 흔히 동형(童形) 비례, 즉 어린 아이와 같은 비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어린 아이들의 비례가 인체에 비해 머리가 큰 것에 빗대어 설명한 것이다.본존불은 경주 남산 장창곡의고분석실처럼 생긴 곳서 출토보살상은 산 아래 마을서
고구려의 거장 담징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특히 1955년 발표된 정한숙의 소설 ‘금당벽화’를 교과서에서 읽은 세대에게는 더더욱 익숙한 이름이다. 이 이름은 또한 우리나라가 고대 일본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도리불사나 혹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양지 스님보다도 훨씬 대중적인 아이콘이 바로 담징이다. 그가 호류지 금당의 벽화를 그렸다는 사실은 우리에겐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도리불사나 양지는 문헌상으로나 유물로나 어느 정도 분명한
일본 나라(奈良)의 고찰 중에서 호류지(法隆寺)는 특히 우리에게 친숙한 사찰이다. 아무래도 백제장인으로 전해지는 도리불사(止利佛師)의 불상과 고구려 화가 담징(曇徵)이 그렸다는 벽화, 그리고 ‘구다라관음’이라 불리는 백제관음상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그 중에서 지난 회에 다룬 아스카데라의 거대한 장육불상을 제작한 구라츠쿠리노도리, 즉 도리불사가 제작한 금동석가삼존상은 일본 학계에서도 복잡한 의문이 뒤엉킨 대표적인 문제작 중 하나이다.670년 화재로 전소된 사찰에623년 조성 석가삼존상 존재호류지 옆 제3절터
일본 아스카의 안고인(安居院)은 ‘아스카데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절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서 원래는 호코지(法興寺)라는 이름으로 596년에 창건되었다. 이 절을 세운 사람은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라는 당시의 대신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쇼토쿠 태자(聖德太子)를 도와 친백제 정책 및 불교 중흥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실제 호코지의 창건에도 백제의 기술이 깊숙이 관여하였음을 ‘일본서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588년 백제의 위덕왕은 불사리(佛舍利)와 함께 혜총(慧聰)을 비롯한 여섯 명의 승려